-
-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 - 야만과 지상낙원이라는 편견에 갇힌 열대의 진짜 모습을 만나다
이영민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3년 8월
평점 :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매년 점점 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나간다. 유명 관광지의 경우 한국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말도 들리는 걸 볼 때 불과 몇십 년 전 김찬삼 홀로 세계여행을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해외여행은 대부분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깝다. 명소를 구경하고, 맛집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한 후 돌아와 이를 자랑하는 일련의 행위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내가 돌아다니고 있는 타국 현지 사람과 문화에 대한 이해는 배제되어 있다.
저자는 지리학자의 관점에서 열대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관광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여행을 하길 바라는 의도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해당 열대 지역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더위, 습도, 폭우, 벌레 등의 존재는 오로지 짜증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겉보기에 남다른 외모의 사람들이 무지와 폭력, 가난에 찌들어서 사는 삶은 동정과 때로는 멸시의 대상으로 비치겠지만, 그네들의 기후, 역사와 정치, 문화와 사회구조 등을 들여다볼 줄 알면 그네들의 삶의 모습과 우리의 것이 별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1부에서 저자는 지리학의 개념으로 열대우림 기후, 열대몬순 기후, 열대사바나 기후로 크게 구분되는 열대기후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열대 지역을 소개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리 수업을 떠올리면 된다.
2부는 본격적으로 열대기후가 특징적으로 발현되는 열대 지역을 세부적으로 파헤친다. 열대우림의 보르네오섬과 아마존을, 사바나 지역인 빅토리아호와 세렝게티 초원을, 킬리만자로 등으로 대표되는 열대 고산지대와, 카리브해 같은 바다 휴양지를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의 시각에서 찾아간다.
열대우림의 생물 다양성과 기후 보전을 위해서 중요한 곳이지만 인간 삶의 터전으로는 부적합한 환경임을, 그리고 인구 증가와 경제개발을 위해 보르네오와 아마존 지역이 계속하여 훼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브라질 정부의 아마존 개발에 전 세계적 환경 파괴의 비난이 있지만, 브라질인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그들의 아마존 개발을 중단시킬 명분이 없다. 전 세계인의 쾌적한 삶을 위해 브라질인만 손해를 감수하라는 주장은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 개발 논쟁도, 대다수의 열대 지역을 휘감는 인종적, 종교적, 정치적 혼란도 결국은 열대 지역 주민들에게 내재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때, 그것은 근현대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강점이 남긴 깊은 상처의 결과임을 상기할 때 이분법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네들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열대성의 개념을 저자도 이렇게 접근하기에 그네들에게 온화하고 동정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리라.
이른바 ‘열대성’이라는 개념은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진귀한 타자를 ‘발견’하여 객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발명’하여 정형화되었다. (P.33)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여행가이드 책자의 성격을 지닌다. 아마존강 원류의 상이한 거대한 흐름이 합류하는 장엄함, 비교적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에서 볼 수 있는 열대우림의 맹렬함을 활자가 아니라 양 눈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생명의 호수에서 죽음의 호수로 오염되고 있는 빅토리아호, 동물 다큐 프로그램으로 친숙하게 된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이야기 등은 시간상, 비용상 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흥미와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여행지의 자연과 문화는 서구의, 혹은 한국 사회의 관점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각각의 삶터에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과 문화의 체계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적응하며 행복한 삶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P.237)
3부는 열대 지역에 대한 인문학적 안내다. 토인비와 카 같은 저명한 역사학자조차도 아프리카를 문명과 역사가 부재한 땅으로 평가하였다는 사실에서 뿌리 깊은 인종에 바탕을 둔 환경결정론을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심도 마찬가지인 게 미국, 유럽 사람과 동남아시아, 흑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서구 근대문명을 이룩하고 식민지를 경영한 국가를 모든 면에서 우월시 하다 보면 각 지역마다의 독자적 고유성은 평가절하하고 무시하기 마련이다.
열대 지역의 식민지 경험은 좋건 나쁘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는 그중에서도 ‘문화 섞임 현상’에 주목한다. 자의든 타의든 서로 다른 인종, 문화, 종교를 지닌 사람들이 섞이게 되면 갈등과 불화가 우선 떠오르지만, 믈라카 사람들, 그리고 싱가포르의 사례를 통해 그것이 결코 필연적인 귀결이 아님을 알려준다.
믈라카 사람들은 서로의 문화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이 서로 얽힌 일상생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교의 차이가 항상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로컬의 일상생활 공간에서 얼마든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P.287)
저자가 설명하는 싱가포르의 열대성은 보타닉 가든,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보면 자연성보다 인공성에 가깝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반강제적으로 독립 당한 그들이 자연개발과 보전, 집단 간 평화 공존을 이룬 역사를 훑어보면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열대 체험을 한 유일한 조선시대 인물인 문순득과 정약전의 인연을 보면 ‘천초(天初)’라는 호가 뜻밖이 아님을 인정하게 된다. 문순득의 신분이 상인이었기에 그의 체험이 더욱더 객관적이고 생생할 수 있었음이 차라리 다행이다.
처음 이 책의 표제를 봤을 때는 열대 지역을 지리학의 관점을 분석하게 해설하는 책으로 생각하였기에 여행가이드에 가까움을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다소간 실망감도 품었다. 점차 읽어나갈수록 대다수 독자에게는 오히려 적절한 지리학적 지식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관광객의 겉핥기 눈길로 열대 지역의 자연과 사람을 보는 태도를 벗을 수 있다면 우리네의 열대 여행은 더욱 뜻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