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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 정글 - 도시와 야생이 공존하는 균형과 변화의 역사
벤 윌슨 지음, 박선령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3년 9월
평점 :
사람 발길이 뜸한 보도블록이나 깨진 콘크리트 틈에 잡초가 자라나면 관리 소홀 또는 퇴락한 느낌이 든다. 건물 사이 공터에 잡풀이 무성하면 보기 흉하게 여기고 위생에 우려를 표시하게 된다. 단독주택의 마당 및 도시공원은 항상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야 기분이 좋다. 지저분한 동네 하천은 눈에 안 띄게 복개해야 미관상 훌륭하다. 저자는 위와 같은 현대 도시인의 인식이 잘못되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도시 자연의 모습이 삶의 질을 높이고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과 도시, 나아가 지구 생태계에 유익하며 필수 불가결하다고 이 책에서 주장한다. 상당히 생소하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굉장히 흥미롭고 참신한 의견인 동시에 꽤나 설득력이 높다.
왜 도시를 이렇게 변화시켜야 하는 걸까? 도시의 야생성은 도시에 서식하는 생물 수를 늘리고 기후 변화의 영향을 완화하므로 솔직히 말해 인간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P.17)
저자의 관점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이다. 순수한 자연 자체는 도시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도시 속 자연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인간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잔디밭처럼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인공 자연을 조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택 마당의 잔디 관리에 소홀하면 민원과 신고로 처벌받게 되는 현실에 부정적이다. 생태학적 관점과, 종 다양성 측면에서 잔디밭은 사막과 동일하다고 본다. 표제가 의미심장하다. 어반 정글, 도시를 정글화 하자는 대담한 주장이다. 저자는 도시의 변두리, 공원, 콘크리트, 나무 식재, 도시하천, 농작물, 도시 동물로 각각 논의의 렌즈를 다양하게 들이대고 있다. 초점은 단 하나 도시의 야생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변두리 땅은 생명 유지 시스템이다. 숲, 초원, 습지, 조석 습지가 원활하게 기능하는 생태계는 기후 변화의 다양한 영향에 맞설 필수적인 완충 장치다. 하지만 우리의 개발 욕심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기도 하다. (P.30-31)
도시의 확장으로 변두리는 계속 개발되고 자연은 점점 후퇴한다. 도시와 전원을 공존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는 실패하였고, 교외는 공원과 주택 정원으로 양분되었다. 저자는 정원에 주목한다. 정원을 예쁘게 가꾸고자 하는 노력으로 종 다양성은 오히려 시골보다 높다고 하면서. 건강한 생태계는 특정 종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P.68)과 같이 도시와 자연환경을 조화시키는 도시 계획 개념을 소개한다.
현대 도시에서 공원의 크기와 중요성 인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도시민 누구나 푸른 녹지와 쾌적한 공기, 서늘한 녹음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배경으로 교목과 관목, 화초류, 아기자기한 연못, 적절하게 배치된 의자, 그리고 여기를 거니는 사람들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도시 속 공원은 자연 자체를 인정하고 허용한 게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편의를 위한 레크리에이션 장소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도시공원에 생물 다양성을 늘려 생태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시도와 사례를 소개하는데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다. 옴스테드의 뉴욕 센트럴파크, 루던의 가드네스크 스타일, 로버트슨의 버켄헤드 공원, 원스테드 플라츠에 소를 다시 풀어놓은 사례 등을 통해 우리는 도시 녹지에 야생성을 도입하여 자연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생물 다양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도시공원의 조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자연사’는 낯설고 모순된 개념이다. 피터와 수코프가 그토록 알리고 싶었던 사상은 도시와 자연이 공존 불가능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 폐허, 콘크리트 균열, 방치된 불모지에서 자라나는 잡초와 식물을 도시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네들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혹자는 폐허와 불모지를 그대로 방치하자는 게 아니냐며 이견을 제기할 수 있지만, 저자는 공지 개발에 찬성의 입장이다. 이쪽의 빈 땅을 개발하더라도 다른 쪽은 빈 땅이 생기기 마련이다. 도시 전체의 항상 완벽한 개발은 불가능해서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빈 땅의 야생성은 일정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 사용되지 않는 모든 장소는 생물 다양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변두리 땅과 불모지에 몰래 숨어들어서 멸시받는 터주식물은 사실 도시 환경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다. (P.157)
<4장 캐노피>에서는 주요 요소인 나무의 도시 생태적 중요성과 식재 방식을 다룬다. 인류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자원이었던 나무가 화석 연료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홀하고 외면되었다는 것 하며, 21세기 도시 생태계의 회복과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나무와 숲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단시간 내 식재로 도시를 녹지화할 수 있는 미야와키 방식이 정말로 부작용 없이 효과적이라면 전 세계의 산림 녹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나무는 21세기와 그 이후에 도시가 의존하게 될 녹색 인프라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습지, 강, 호수 등이 포함된 더 넓은 생태계의 핵심이다. 망가르 바니와 그곳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P.212)
개인적으로 복개 하천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경과 생태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 책에서도 소개된 청계천을 비롯해서 많은 도시에서 하천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녹지가 부족한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하천 복원은 요원해 보인다.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덮어씌우면 그것으로 근원적 문제 해결이 되는 게 아니다. 오염된 하천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환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하천을 공원화하지는 말자. 요즘 지자체마다 공원 조성 사업으로 하천의 유로를 바꾸고 주변에 운동시설을 마련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하천 꾸미기에 바쁜데, 도를 넘어서 자연 하천이 아니라 인공 하천에 가까운 경우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도 로스앤젤레스강을 이름뿐인 강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LA에 이런 강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 기후 변화로 게릴라성 폭우가 빈발하고 있는데,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표면은 물을 흡수하고 저장하지 못한다. 강, 호수, 습지 같은 수생 생태계의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게 <5장 생명력>이다. 습지는 메꾸고, 갯벌은 간척하는 게 역사적 흐름이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습지와 갯벌을 보호하는 데 안달이다. 불과 수십 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단견과 무지가 새삼 드러나는 사례다.
역사 대부분을 달갑지 않은 늪이나 불편한 호수를 메우려고 노력했던 우한 같은 도시들이 이제는 습지를 되살아난 수경 도시 개념의 중심적인 특징으로 삼으려고 애쓰고 있다. 물과 억지로 싸우려다가 잇달아 패배하기보다는 도시에서 물과 더불어 살면서 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P.248)
옥상 텃밭, 아파트 화단 가꾸기에 열심인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여유로운 마당이 부족한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뭔가를 심고 재배하는 그들을 볼 때면 놀라움과 함께 극성맞다는 양가의 감정이 든다. 벤 윌슨은 이런 우리네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도시와 교외에서 농작물 재배를 강화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인간의 엄청난 배설물을 오염물질로 폐기하지 말고 유기적으로 재활용함으로써 환경오염을 줄이고 식량과 채소 자급자족에 이바지할 수 있고, 근거리 농업으로 원격지 운송에 따른 오염물질 배출 감소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의외로 좁은 땅에서도 높은 농업 생산성이 가능하며, 도시민들에게 신선한 농작물 공급이 가능하니 여러모로 좋다는 것이다. 단순히 녹화 사업이라면 나쁘지 않지만, 온통 아파트로 도배하고 지속적으로 반경을 확대해가고 있는, 부동산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아파트 왕국 서울이라면 한숨이 나온다. 그나마 있는 전답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야산은 평탄화하는 상황에서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7장 주트로폴리스>는 더욱 비현실적 주장으로 다가온다. 식물과 달리 도시에 거주하는 동물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훨씬 크다. 반가운 심정보다는 두렵고 경계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였던 쥐나 바퀴벌레는 물론, 요즘은 비둘기마저 혐오의 대상이다. 길고양이나 떠돌이개는 어떠한가. 저자의 주장처럼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도시 환경을 악화시킨 인간 자신에게 있음은 사실이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호수와 하천의 물고기, 학과 두루미 같은 인간과 접촉하지 않는 무해한 동물이 아니라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밤중에 길거리에서 여우, 오소리, 코요테를 마주친다면 기쁨의 감정이 생길지 의문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크게 마련이다.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을 복원하는 사업은 분명 의의가 있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반달가슴곰은 야생에서 살아야 하는데 등산객과 맞닥뜨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지내기에는 지리산 권역이 좁아서 이웃 산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다고 하는데 개체 수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과연 궁금하다. 그래서 저자도 동물에 관한 내용을 가장 마지막에 싣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태까지 도시 속 자연과 식물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깔끔하게 관리되고 정비된 정원과 공원보다 그냥 방치된 무성한 잡초의 생태학적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며, 도시의 자연을 복원하고 공존하는 게 생태 차원을 넘어 인간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중차대한 사안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저자의 이 모든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커다란 방향성 측면에서 그릇되지 않음을 독자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어차피 도시에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인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들 공허한 울림만을 남길 뿐이다. 솔직히 이따금 전원생활을 하면 즐겁고 행복하겠지만 일상을 자연 속에서 보내라고 하면 대부분 난감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 친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을 기록에 남긴다.
잡초에게 기회를 주자. 그들은 미래의 도시 식물이다.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