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세 소극집
김찬자 지음 / 연극과인간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수록 작품>

빨래통

파테와 타르트

메트르 미멩 학생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

 

내친 김에 또 다른 프랑스 중세 소극집을 읽는다. 수록작 6편 중 2편은 앞서 읽은 책과 중복이다. 앞선 책은 운문 형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반면, 이 책의 옮긴이는 구어적이고 산문적인 번역”(P.8)을 택하였다. 가급적 원문을 존중하여 운문체가 낫겠지만 어설프면 오히려 못하니 순전히 내용 전달의 측면에서는 장단점이 있으니 선택의 사안이리라.

 

이 책에 실린 소극을 통해서 현대의 일반 독자가 기대하는 건 물론 예술적 감흥은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통용되는 통시대적 보편성도 당연히 아니다. 소극을 읽으면서 정제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중세 서민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사서를 통해 활자화되고 박제화된 기술 방식으로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미덕이다.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유추해 보자면, 음탕함과 속임수가 노골적이며 의외로 매 맞는 남편이 자주 등장한다. 오쟁이 진 남자는 단골 소재이며, 신부와 변호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함도 알 수 있다. 악마조차도 두려움보다는 우스갯거리로 전락할 정도다. 어쩌면 이들은 모두 중세 민중에 국한할 것 없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거짓 없는 민낯일 것이다.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 맞는 남편의 장면은 오히려 신선하다. 이것이 실제의 반영인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극 내에서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빨래통>이 대표적이지만,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에서도 병든 주인은 신부와 외도를 즐기려는 부인에게 애처롭게 두들겨 맞는다.

 

음탕, 음란과 외설은 사실 한 끗 차이다. 적당한 음담이 대화와 문학에서 분위기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서민들의 언행에서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성에 솔직하다는 평도 가능하다. <빨래통>에서 아내는 남편 자끼노에게 적어도 하룻밤에 대여섯 번”(P.17, 2)의 봉사를 요구한다.

 

(미멩) 아버지! 엉덩이가 몰랑몰랑한데요.

(라울 마쉬) 어쨌든 그 아이가 숫처녀라는 것은 내가 보증하지.

(교사) 조심해! 정신 나갔어? 젖가슴이 몰랑몰랑할 텐데. (P.55, 8)

 

<메트르 미멩 학생>은 이색적인 소재를 다루는데, 학생이 라틴어 공부에 너무 몰두하다가 그만 모국어를 까먹었다고 하는 설정이다. 그에게 다시 모국어를 되살려주려는 여러 노력이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마지막 장에서 미멩이 약혼녀를 둘러메면서 이어지는 대목이 성적 골계미를 담고 있다. 현대의 도덕관이 아니라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이 요구된다.

 

<파테와 타르트>, <피에르 파틀랭 선생>, <악마가 지옥으로 영혼을 가져간 방앗간 주인의 소극>의 공통점은 바로 사기, 즉 속임수에 있다. 전자의 두 편은 사기를 친 당사자가 처음엔 멋지게 성공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가 된통 당한다. 특히 변호사 파틀랭 선생은 만만찮은 옷감 가게 주인을 힘겹게 속여넘기고 득의양양하고, 옷감 가게 주인과 양치기의 소송도 승소를 거둔다. 절정의 순간, 그는 만만하게 보았던 양치기에게 하릴없이 속임을 당하고 만다. 이 작품은 중세 소극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후자의 방앗간 주인 이야기는 가톨릭 신부의 위선적인 음란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소극의 소재로 각종 악마를 등장시킨다. 부인과 신부에게 수세에 몰리고 죽음도 멀지 않게 된 주인의 영혼을 가져오기 위한 어리숙한 악마 배리트의 행동을 어처구니없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하필이면 항문이기에 생기는 해학적인 장면은 시원하게 용변을 보는 주인과, 기뻐서 신나게 가방에 영혼을 담아가는 악마가 대조적이기에 비롯한다.

 

소극의 내용과 주제가 항상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극의 작가 중에는 꽤나 높은 지성을 가진 인물도 있는데, <피에르 파틀랭 선생>은 이것에 대한 입증이다. 끈질긴 옷감 가게 주인을 따돌리기 위해 혼수상태에서 헛소리 연기를 하는 파틀랭 선생은 다양한 언어로 문장을 지껄인다. 옷감 가게 주인에게는 헛소리로 들리지만, 일부 지적인 독자에게 작가의 수준을 과시하는 의도도 있다고 하겠다. 5장에서 그가 구사하는 외국어와 사투리는 다음과 같다. 리모주 사투리, 피카르디 사투리, 플랑드르어, 앵글로 노르망어, 브르타뉴어, 로렌 사투리, 라틴어.

 

(쥬냉) 나는 아버지의 아들도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라는 거지. 제기랄! 결국 쥬냉이 쥬냉이 아니라는 말인 셈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이야? 어릿광대 자노? 아니지! 나는 아무의 아들도 아닌 쥬냉이야. 내가 존재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군. (P.72, 9)

 

<누구의 아들도 아닌 쥬냉>은 웃음 속에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어 놀라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는 쥬냉 앞에 가톨릭 신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선언한다. 반면 어머니는 신부는 절대 쥬냉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혼란에 빠진 쥬냉에게 점쟁이는 한술 더 뜬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려면, 저 아이는 아무의 아들도 아니겠네요.”(P.71, 8) 이렇게 쥬냉은 아무의 아들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쥬냉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굉장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소극이다.

 

중세는 분명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수준 높고 장엄한 종교극의 상연은 종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이벤트이지만, 일반 서민에게 종교와는 무관한 소극이 더욱 친숙하고 일상적이라고 한다. 자기네들의 적나라한 삶의 희비, 애환을 담고 있기에 그러하리라. 이로 미루어 볼 때 중세 소극을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의 실질적 삶의 모습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고 그것은 중세 소극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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