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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세 소극선 ㅣ 지만지 희곡선집
작자미상, 정의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 작품>
빨래통
땜장이
구두 수선공 칼뱅
파테와 타르트
굉장히 생소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 같았다. 먼저 ‘소극’이란 희극의 한 유형인데, 작품해설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프랑스 소극의 원제목에는 ‘소극(farce)’이라는 명칭이 항상 붙어 있다. 8음절 운문으로 쓰인 소극은 대부분 300~500행으로 구성된 짧은 단막극이다. (P.116)
소극은 군주, 귀족과 영웅 같은 상류 계급이 아니라 중세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다룬다.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극 속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다는 점이 흥미와 당혹감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 부부간에 욕설과 폭력을 직설적으로 주고받는 행동 등이 나타난다. 비천한 소재와 배경, 비속어의 대사, 비루한 인물 행동 등으로 인해 한때는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고전과 현대 희극의 큰 줄기를 이해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중세 소극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다. (P.111)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극은 현학적이거나 젠체하지 않고 솔직한 서민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더 부담 없이 다가온다. 분량 면에서는 단편이나 콩트, 코미디로 보자면 슬랩스틱 유형이라고나 할까.
<빨래통>과 <땜장이>는 부부간의 주도권 다툼이 팽팽하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남존여비를 떠올리지만, 이들 작품을 볼 때 최소한 서민사회에서 여성의 기세는 남자에 전혀 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에게 욕설을 날리는 것은 예사고, 집안일을 마구 부려 먹는다거나 심지어 폭력도 행사한다.
(아내) 없어? 있어, 있다니까! / (남편의 따귀를 때리며) / 이게 어디서 까불어!
(자키노) 그만해! 하면 되잖아.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 다음부터 주의할게. (P.16, <빨래통> 3장)
<빨래통>에서는 남편이 잔꾀를 부려서 아내의 순종을 끌어내 결국 우위를 차지하는데, 문득 <베니스의 상인>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연상된다. 반면 <땜장이>와 <구두 수선공 칼뱅>은 아내의 승리로 끝난다. 아내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꼼짝도 하지 않는 내기에서 진 땜장이 남편, 옷 한 벌 사달라는 아내의 간청에도 노래만 부르면 외면하다가 지갑을 탈탈 털린 칼뱅. 비록 과장이 심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가정생활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파테와 타르트>는 제과점 주인 부부를 속여서 파테를 얻어먹은 두 거지가 타르트마저 속여 먹으려다가 들통 나서 신나게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이 작품은 물론 <구두 수선공 칼뱅>에서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지만 거짓이 드러나면 곤욕을 치르게 된다. 칼뱅의 아내는 남편을 무사히 속였고 거지들은 실패하였다.
소극은 단독 공연보다는 종교극의 막간에 또는 축제나 장날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상연되었다고 한다. 길이의 제약, 소재의 서민성, 지나칠 정도의 희극성이 요구되었던 까닭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 중에 극 전체의 내용과 성격에 무관한 짤막한 상황극이 삽입되는 사례가 있는데, 아마 이것도 비슷한 성격으로 보인다. 이 책의 <땜장이>와 <파테와 타르트>의 끝 장면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즉 이제부터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자는 대사로 공연을 끝맺는다.
(땜장이) (관객에게) / 여기 계신 여러분도 / 와서 같이 한잔하죠. / 여성의 승리를 위해 / 다 같이 축배를 들죠.
(아내) 그럽시다. 그거 좋죠.
(남편) 맘껏 먹고 마십시다. / 다들 어서 오십시오. / 남녀노소 직업 불문 / 위아래 가리지 말고 / 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 신나게 놀아 봅시다. (P.43-44, <땜장이> 4장)
(거지2) (관객에게) / 자, 우리가 말입니다, / 몽둥이로 맞았지요.
(거지1) 그래요, 어쨌든 이거 / 어디 가서 막 떠들고 / 다니면 곤란합니다. / 자 한판 놀아 봅시다! (P.108-109, <파테와 타르트> 19장)
이러한 소극 작품을 문학의 예술성 기준에서 보자면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이 항상 우아하고 고상하지 못한 게 현실 아닌가. 차라리 B급 장르로 폄하되더라도 중세 프랑스 서민의 삶을 당대는 물론 현대 관객들이 거리낌 없이 낄낄거리며 즐길 수 있다면 자체로서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