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람진 단편집 지만지 고전선집 618
니콜라이 카람진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작>

가엾은 리자

보른홀름 섬

시에라 모레나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 두 가지 성격

 

카람진은 푸쉬킨 이전 러시아의 대문호로서 어찌 보면 본격적인 러시아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카람진이 본격적인 문학으로서 단편소설을 쓰면서 푸쉬킨 이후 작가들의 작품이 수용되는 문화적 토양이 구축되었다. 푸쉬킨이 카람진의 감상주의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면서 러시아문학은 비로소 세계문학의 무대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다. 사랑은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다만 감상주의답게 카람진은 이루어진 사랑보다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그리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에 천착한다. 사람들은 행복한 사랑에는 잠시 흐뭇해하지만, 불행하고 슬픈 사랑에는 감정의 커다란 오르내림을 경험하는 법이다. 카람진을 감상주의로 일컫는 이유는 이들 작품이 독자의 감상에 호소하고 감정을 격발하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화자의 깊숙한 개입이 눈에 띈다. 화자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 간에 엮어진 사건과 행동을 기술하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화자는 주인공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고 독자의 호응을 유도한다. 이처럼 감정 표출이 두드러지다 보니 느낌표가 자주 등장하는 점이 이채롭다.

 

그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지만, 혀가 제대로 말을 듣질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물만 내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는구나! 아아! 차라리 내가 쓰고 있는 게 소설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이토록 가슴 아린 슬픈 실화를 옮겨 적고 있단 말인가! (P.74, <가엾은 리자>)

 

다른 작품의 화자와는 달리 <시에라 모레나>의 화자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친구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고 믿기에 슬픔에 빠진 연인을 위로하다가 서로 마음을 열게 되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자초지종도 알아보지 않고 엘비라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자살하는 알론소도, 사랑과 자책감으로 수녀원에 들어간 엘비라도 모두 딱하다. 이 모두가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냉혹한 세상이여! 나는 너를 떠나노라! 인간이라는 이름의 미쳐 버린 존재들이여! 나는 너희들들을 떠나노라! 인간들이여, 잔혹한 광란 속에 미쳐 날뛰어라, 서로를 갈기갈기 찢고 죽여 버려라! 내 심장은 너희를 위해서는 이미 죽어 버렸고, 너희의 운명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내 심장은 그것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P.120, <시에라 모레나>)

 

하늘과 운명의 장난을 원망해야 할 건이 또 하나 있으니 <보른홀름 섬>의 고딕양식 성의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힌 한 여인의 사랑이 그러하다. 사랑은 맹목적이다. 서로가 뜻이 맞고 가족과 사회가 한 쌍을 축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련만 때로는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마음에 두고 전전긍긍하는 예도 없지 않다. 화자가 보른홀름 섬으로 가는 여정에 마주친 남자와 감옥에 갇힌 여자, 그리고 그들을 가둔 노인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독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 이 역시 누구를 책망할 수 없기에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 또한 애달플 뿐이다.

 

인간의 법률이 유죄라 하네. / 나의 사랑의 대상을. / 하지만 오 심장이여! 누가 / 그대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P.84, <보른홀름 섬>)

 

대체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덕을 사랑하고, 그의 성스러운 율법을 존경하는 이 허약하고 백발이 다 된 늙은이에게 그의 분노의 술잔을 모두 퍼부었는지를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게나. 대체 왜? (P.106, <보른홀름 섬>)

 

<가엾은 리자>의 에라스트와 리자는 푸쉬킨의 유명한 소설 속 오네긴과 타티야나를 연상시킨다.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모두 도시에 물들지 않은 시골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후자에 비하면 리자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는 면에서 한층 처절하다. 농부의 딸인 처지에 언감생심 귀족과의 결혼을 꿈꾸었다고 비판하면 할 수 없다. 남자의 삿된 약속을 홀딱 믿을 만큼 그녀는 순진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우며, 오직 사랑에만 헌신하는 여인이기에.

 

에라스트, 오네긴, 페초린, 오블로모프. 이들은 모두 러시아문학의 특징인 잉여 인간이다. 카람진은 이처럼 불후의 독자적 인간형의 창시자라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후배들에게 비하면 에라스트는 더욱 순진하면서도 비열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리자! 상황이 달라졌어. 사정이 좀 생겼거든. 나는 이제 약혼한 몸이야. 그러니까 제발 나를 조용히 내버려 둬 줘. 너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나를 잊는 편이 나아. 나는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래서 네가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야.” (P.73-74, <가엾은 리자>)

 

수록작 중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역시 에라스트다. 그는 감성적인 사람의 전형이고, 친구 레오니트는 이성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작가는 두 친구의 성격과 운명을 양분해서 제시한다. 마치 독자에게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선택하라는 듯. 양자택일의 문제는 지나친 극단화에 있다. 세상 누구도 온전한 에라스트, 온전한 레오니트일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에라스트보다는 레오니트가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를 포함한 예술가의 시각에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에라스트가 더욱더 매력적이겠지만. 옮긴이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라스트는 천국의 축복 속에 있거나 지옥의 고통 속에 있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닐 때, 즉 충만한 감정이 없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무료함에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레오니트는 행복이 뭔지도 몰랐고,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밝고 온화한 영혼의 평화로운 안정에 만족하며 살았다. (P.140,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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