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ㅣ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를 ‘나의 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시오노 나나미는 멋진 사람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상 정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현실 정치론이다. 철저히 현실에 정치를 두고 성공할 수 있는 통치체제와 방식을 정리하였다. 그의 말대로 세상 모든 사람이 죄다 선인뿐이라면 그의 사상 내용도 바뀌었을 것이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전기이자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역사서이다.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삶을 세 부분- 임용 전, 임용 후, 실직 후 -으로 나뉘어서 각각 그의 삶과 당대 이탈리아 정세를 들여다본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토박이다. 그의 삶은 피렌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관료 생활, 저작 목표도 오로지 피렌체가 중심이 된 이탈리아 통일이다. 이 책은 또한 피렌체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특히 1부는 마키아벨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이므로 당대사에 관한 서술이 많아 이채롭다.
마키아벨리즘의 냉혹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가 매우 냉혹한 인물일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나나미는 여러 전거를 들어 그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이며, 워커홀릭임을 보여준다. 숱한 출장 동안에 부족한 출장 경비로 전전긍긍하고, 아내의 히스테리에 심란해하면서도 술집에 드나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그의 <군주론>이 메디치가 정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한 용도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회복된 공화정에서 자신의 복직이 거부당하자 상심하여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딱딱한 정치사상가가 아니라 당대의 인기 희곡 <만드라골라>의 극작가였다는 이력을 헤아린다면 그의 인물됨은 많은 오해와 편견에 가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15년간의 관료 생활을 통해 그는 정치와 외교를 보는 안목과 경험을 쌓았고, 실직 후 14년간 그것을 자신의 독자적 사상과 글로 구체화하였다. 흔히 실직 후 그가 산장에 틀어박혀 우울한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나미는 그와 베트리의 왕복 서한, ‘오리첼라리의 정원’의 젊은이들과의 교류, 구이차르디니와의 만남과 동행 등 그가 결코 행동을 멈추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공화국 제2 서기국 서기관의 직책에 있었는데, 실질적 외교관으로서 수많은 출장, 국민군 창설 주도 등 표면상 권한보다 역할의 중대성이 매우 컸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대학 출신이 아니기에 외교 대사로 임명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한 사례는 그의 유명한 저작에 나오는 여러 정치 사례를 경험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국민군 창설로 피사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에 대한 실례도 적용할 수 있었다. <군주론>은 난데없이 세상에 던져진 저서가 아니다.
처녀작에 한 작가의 장래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면, 이 「피사 문제에 관한 논고」에서도 마키아벨리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특색을 완벽하게 발견할 수 있다. (P.229)
<군주론>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를 군주정 옹호자로 오해하고는 하지만, 기실 그는 굳이 나누자면 공화정에 심정적으로 가까운 인물이다. 그의 성장 시기와 직업관료로서 보낸 시절 모두 피렌체의 공화정 체제였다. 그는 군주정과 공화정 중 무엇이 최선인가에 관심이 없었다. 당대 현실에서 가장 뛰어난 역할을 수행하는 체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할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다. 그가 살펴볼 때 당대 이탈리아의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군주정이 낫다고 보았기에 그런 글을 쓴 것뿐이다. 이렇게 보면 그는 일종의 정치공학자라고 하겠다. 차라리 테크노크라트로 간주해도 좋다.
그는 단 한 번도 어떤 하나의 정체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로서는 왕정이건 귀족 정체건, 혹은 민주 정체건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 그런 그가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정체로 하여금 효율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시킬 수 있느냐는 것 한 가지였다. (P.374)
<군주론> 하면 으레 체사레 보르자가 연상된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갖고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대놓고 추켜세웠던 인물이다. 저자도 언급하였듯이 체사레는 당대로서는 매우 독특하면서 혁신적인 인물이다. 포르투나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이탈리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가 피렌체의 황금 시기를 이끌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아니라 체사레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은 시대적 환경이 바뀌었음을 고려해서이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물 유형은 로렌초가 아니라 체사레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국가를 수립 운영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마키아벨리는 판단하였다. 즉 체사레라는 인물은 마키아벨리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발렌티노 공작 체사레 보르자가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일변시킨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막연하게나마 이미 품고 있던 생각에 뚜렷한 형태를 준 것뿐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누구보다도 자극한 인물인 것이다. (P.261)
마키아벨리의 만년은 피렌체와 로마의 몰락과 궤를 같이한다. 로마 교황이 메디치 가문 출신이기에 그들은 운명 공동체가 되고 만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에게 완패당하고 로마가 대약탈을 당한 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피렌체 공화정은 메디치가의 군주정으로 소멸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삶은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시기와 운명을 같이 하고 만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창작 뒷이야기’에서 자신이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서는 또 한쪽의 웅이었던 피렌체공화국을 그리는 것이 내 목적이었던 거예요. 마키아벨리를 충분히 묘사하면 피렌체공화국의, 그리고 그 피렌체에서 태어난 르네상스의 쇠퇴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P.589)
그는 르네상스의 꽃이었던 피렌체의 몰락을, 마키아벨리의 삶을 통해 비추었다. 이는 시오노의 저작 관심이 훗날 <로마인 이야기>로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중세르네상스 시기에 집중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양문명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개화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수명을 다하고 수백 년간 고통과 혼란의 시절이 도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시오노는 친구 마키아벨리를 역사 속에서 소환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직접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