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쥐스킨트의 대표작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와 이 작품의 조나단 조엘 씨의 공통점은 양자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조나단의 유년 시절 전쟁 체험을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물론 부모님이 모두 끌려가 사라진 사실이 가볍지는 않지만 - 다루는데, 말미에서 다시 한번 이번에는 무겁게 다룬다. 지하실에 갇혔던 기억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조나단이 집의 지하실에 갇힌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점은 그의 심리 속에 깃들인 강한 영향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아니, 그것은 어렸을 때 쓰던 방이 아니라 지하실, 정말 부모님이 살던 집의 지하실 같았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P.105)

 

솔직히 처음엔 조나단의 행동이 와닿지 않는다. 일찍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자랐으며, 부정한 아내가 가출해버렸다는 사실은 동정할 법하다. 그렇다고 조나단처럼 세상과 사회를 단절하고 멀리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 허름한 아파트의 조그만 자기 방을 안식처와 도피처로 삼고 애인처럼 간주하는 조나단처럼.

 

비둘기 사건은 분명 조나단에게 생경하고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결말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면 차라리 그에게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거부하고 폐쇄적인 그만의 세계의 문을 열고 사회 속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두 마디 인사 외에는 대화 자체를 꺼리던 로카르 부인에게 당당히 불만을 토로하는 조나단의 용기와 변화를 주목한다. 옷이 찢기자 원인 제공의 우유 팩을 꽉 구겨서 잔디밭이든 모랫길이든 상관도 안 하고 아무 곳으로나 휙 집어던지는행동은 이전의 그라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떠나 그가 비로소 실제, 현실에 눈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 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레바퀴는 자꾸만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눈을 깜짝거릴 때마다 그 괘씸한 모서리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것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 나뒹구는 찢겨진 신문 조각이라든가, [......] (P.53)

 

조나단이 갈구하는 평화와 안온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 20년이 넘는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거리의 광경이 이제야 비로소 그에게 실체로서 다가왔다. 잇단 불운에 평온하였던 그의 심경은 불안과 자기혐오로 싹 트고 이어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로 흔들리고 일그러지는데, 겉보기와는 다르게 위험한 현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관용과 평온으로 위장한 채 거짓 삶을 살던 조나단의 가면이 벗겨지고 맨얼굴과 정신으로 실제 세상의 풍파를 마주친 놀라움과 두려움의 반응이 적절하다.

 

그의 몸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P.85)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조나단과 거지의 비교에 있다. 힘들게 세상을 버텨나가는 자신에 비해 너무나 무위도식하는 거지를 향한 시기와 분노를 갖던 조나단은 어느 날 거지의 똥 누는 모습을 목격한 후 부러워하는 일말의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공원에서 거지와 자신의 점심 식사를 비교한 후 다시금 자괴감에 빠진다. 퇴근길에 잡화상에 들러 산 저녁 식사 메뉴는 거지의 점심과 똑같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사실 비둘기는 바퀴벌레와 쥐처럼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물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새에 불과한 존재에게 조나단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는 왜 그럴까 하는 의아심만을 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신과 약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대하고 유의미한 그 무엇. 그것이 조나단에게 있어 비둘기로 촉발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하게도 조나단은 자살하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자기 집 아파트 복도는 말끔하게 치워졌고 비둘기는 사라졌다. 이웃과 세상과 단절하고 소외된 채 살아오던 조나단의 코와 귀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더는 홀로 된 존재가 아님을, 세상의 일원이 되었음을 감각적으로 일깨워주는 발견이다. 아마 그는 다시는 비둘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아래층 세대들이 있는 곳에서 일찍 깬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 문이 닫히는 둔한 소리, 낮게 틀어 놓은 라디오 음악 소리. 그리고 그에게 아주 친숙한 냄새가 갑자기 코를 찔러 왔다. 라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자 마치 직접 커피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공포가 사라져 버렸다. (P.109)

 

조나단은 주변인이다. 앞서 읽은 소설을 포함하여 쥐스킨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그러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항상 따뜻하다. 외면하고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그네들의 미묘하고 연약한 행동과 감정선의 떨림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세상에 무심히 툭 던진다. 우리는 조나단과 같은 이들의 존재를 문득 깨닫는다, 마치 이전에 없었던 현상을 처음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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