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린 - 낭만주의 시대를 물들인 프리마돈나의 사랑
빌헬미네 슈뢰더 데브리엔트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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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존재를 무슨 계기로 알게 되고 읽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점 단기 기억력이 감퇴하는 징조이리라. 무엇보다 베토벤, 베를리오즈와 동시대 프리마돈나의 자서전이라는 점, ‘카사노바의 회상록에 버금갈 유일한 여성의 자서전이라는 아폴리네르의 말을 인용한 선전 문구 등이 끌렸다. 얼마나 짜릿하게 썼길래 19세기 중반에 센세이셔널을 일으켰을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내가 평생 고고하게 살아왔으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이런 고백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쾌감을 즐기려 했고, 또 즐겨왔던 모든 순간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P.85)

 

유럽 에로티카 문학의 걸작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적나라한 장면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 28세 이전의 성적 편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노골적이고 세밀한 성적 묘사는 일체 없다. 저자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자신의 성적 호기심이 어떻게 발현되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한 여정과 노력, 양태가 어떤 식으로 행해졌는지를 기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대 숙녀에게 요구되는 성적 정숙을 표면적으로 위장한 채 암암리에 동성애와 이성애를 즐기는 저자의 욕구는 솔직하기에 당당한 면도 있다. 지금이야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추세지만 2백 년 전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나는 방탕에 대해서 대다수 사람과 다른 입장이다. 누구나 남녀 가릴 것 없이 자기 몸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신체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자유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P.223)

 

성의 향유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이렇다.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견해지만, 자유의사에 따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성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녀였던 저자는 부모님의 은밀한 부부관계를 엿보면서 성에 눈뜨게 된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채 소녀는 자신이 본 것의 실체를 알려고 애쓴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에도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 소녀는 훗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것의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비로소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도 어머니처럼 살고 싶었다. 항상 남편에게 참신해 보이려 애쓰면서 말이다. 남편의 공상에 응하면서 한편 욕망을 감추려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열쇠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숨기는 것 말이다. (P.98)

 

데브리엔트는 동성애를 꺼리지 않는다.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쾌락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동성애를 통해서다. 마르그리트, 루돌핀, 로즈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그녀는 여성에게 있어 성의 의미와 자세를 배웠으며 남성과의 사랑과는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즐거움을 얻고 정서적 만족도가 높았다고 밝힌다. 확실히 이성 간에는 모종의 긴장이 흐른다면 동성 간에는 훨씬 더 자유롭고 느슨한 분위기가 허용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녀는 동성애의 부도덕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다운 성은 더럽고 추잡한 개념이 없으므로.

 

저자는 오페라 가수로 성공을 거두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항상 처신에 신경 써야 했다. 겉으로는 고고하고 정숙하되, 속으로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추구하는 그녀는 다양한 성적 모험을 경험한다. 일찍이 청년을 유혹하고, 이탈리아 왕자와 루돌핀과 함께 쓰리섬을 한다든지 마조히즘을 구경하거나 사형 장면을 지켜보고,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헝가리 산적들과 막무가내식 관계를 갖는다든지, 영국에서는 화제가 된 시간(屍姦) 소문을 듣고 경악하기도 한다. 도중에 상드와 뮈세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누군가 주장했지만, 성과 윤리는 사랑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특별한 여건에 의해 좌우된다. 이제부터 나는 이런 경험들을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한다. (P.11, <글을 시작하며>)

 

애정행각과 성적 탐닉의 모험담을 자랑하고자 아님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는 당대 사회에서 성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를 비판한다. 그토록 중요하고 성에 대해 무지하기에 많은 처녀들이 구렁텅이로 빠져든다고 주장한다. 남성의 성적 일탈에는 관대하지만 여성에게는 냉혹한 사회,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에게 올바른 성 이해는 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이브의 호기심으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선,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것으로 낙원의 문은 닫히는 것이 아니라, 활짝 열리기도 한다. (P.73)

 

저자는 원죄를 거부한다. 성을 통해서 인간은 더욱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숙의 가면을 쓸 필요가 없고 솔직해야 한다. 연인 내지 부부관계에서 정념과 욕정에 휩싸여 황홀을 맛보지 못한다면 누구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 저자의 모험과 편력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자유로운 성적 탐닉은 일개인으로서는 무해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에 만연될 때 그것은 사회질서의 문란으로 이어짐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정당하고 떳떳한 법적 관계에서 인정받는 이성과의 성행위라면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거야말로 외설, 퇴폐, 변태 등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동의하였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회고록은 당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그 자유로움이 사회적 억압과 금기를 깨뜨리는 해방감을 여성 독자들에게 주었던 데서 연유한다고 본다. 여성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성이 숨기고 움츠려야 하는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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