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기타맨 지만지 고전선집 386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욘 포세의 희곡 작품집이다. 데뷔도 소설이고, 근래는 소설가로 더 각광받지만, 포세가 세계적 지명도를 얻게 된 바탕은 극작가로서다. ‘입센의 후계자라는 칭호는 연극 무대에서 포세가 갖는 입지를 알려준다.

 

기존 포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 글에서 일관적으로 등장하는 특징으로 반복과 축약, 침묵과 사이의 공간을 언급하였다. 마침표의 부재와 쉼표의 사용, 끝없는 반복은 소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 무엇을 가리키는지 와닿지 않았다. 이제 희곡 작품을 읽으니 그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포세의 희곡은 읽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철저히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여 무대 위에서 배우가 실제로 발성하고 연기할 때 빛을 발한다. 음악적 요소의 문학화라는 특성도 실제 상연에서 두드러진다. 대사의 반복은 고저장단, 감정이 깃들어 있을 때 리듬이 발생하며, 늘였다가 줄었다가 하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짧은 사이와 침묵을 통해 이어짐과 중단을 통해 긴장과 여운이 어우러진다.

 

청년

(불안해하며)

집을 금방 못 찾았어

(짧은 사이)

하지만 결국 집을 찾아서 / 문을 두드렸는데 /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어

(짧게 웃는다)

... (P.25)

 

대사 못지않게 많은 지문은 단지 인물의 행동을 알려주는 범위를 넘는다. 작가는 대사와 함께 지문을 통해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와 진행을 이끌고 있다. 유독 많이 등장하는 “(짧은 사이)”는 기나긴 대사가 줄줄 이어지는 고전적 연극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면서, 인물의 사고와 행동이 단편적임을, 독자는 행간의 의미를 찾아야 함을 뜻한다.

 

처녀

(체념한 듯)

넌 귀담아듣는 적이 없어 / 그냥 서 있을 뿐이야 / 내가 뭘 말하면 / 넌 제대로 듣는 적이 없어 (P.34)

 

<이름>에서 독자는 등장인물 간 단절과 불통을 우선하여 발견한다. 처녀는 청년에게, 여동생은 엄마와 아빠 간, 무관심과 소통단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이다. 처녀의 엄마와 아빠는 각각 청년을 처음 만나지만 무관심하다. 후자는 아예 청년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청년이 일어서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버지는 안락의자에 앉기 전에 여동생에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아버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청년을 의식하지 않는다.) (P.57)

 

아버지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쉽게 비난하지 말자. 그는 온종일 일에 허덕이다 지쳐서 귀가하는 가련한 인물이다. 엄마의 무심함도 마찬가지다. 그는 몸이 아파서 잠시 움직였다 다시 누워야 한다. 예비 처갓집에 와서 주구장창 책만 읽고 있는 청년도 딱하기 그지없다. 처녀와 청년이 결혼을 진정 생각하고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니다. 처녀는 어떠한가? 옛 남자친구 비아르네를 맞이하는 그녀의 태도는 결코 훌륭하지 못하다.

 

떠난 청년, 뱃속 아기의 아빠인 청년을 처녀는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가 돌아올까, 그럴 거라고 믿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처녀 또한 청년을 진정 사랑하거나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처녀는 옛 남자친구 이름을 아기 이름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비아르네가 과연 달가워하고 동의할지 알 수 없다.

 

<기타맨>은 모놀로그다. 문득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가 떠오른다. 화자가 남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포세의 인물은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는 중년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모놀로그는 오롯이 화자 자신에 집중하는 장르다. 화자의 생각, 화자가 바라보는 세상 모두가 철저하게 화자의 기준에 따른다. 상대역 없이 홀로 극을 이끌어가기에 모놀로그는 내면적으로 고독하다. 대체로 분량이 짧다. 길게 이어갈 극적 요소가 부재해서다.

 

기타맨은 외롭고 가난하다. 가족도 주변에 없다.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나날을 버텨나가는 정도다. 조금 전에 아내를 화장한 남성과 기타맨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다. 이 작품을 시종 관통하는 독특한 대사가 있다.

 

그런 거야 /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 말하자면 그런 거야 (P.187)

그런 거야 / (사이) / 모든 것을 위한 / 시간이 있지 (P.198)

모든 건 그 자체로 오는 것 / 생길 일은 그냥 그렇게 생기는 거야 (P.202)

 

달관적이면서 조금은 체념하는 듯한 대사. 기타맨의 비감의 정조와 함께 무기력함마저 자아낸다. 여기서 그의 삶이 이렇게 암울하게 스러져갈 것임을 예감하는 독자는 섣부르다. 그는 자신의 삶이 피동적으로 흘러감을 거부한다. 자신의 기타 줄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는 그에게는 일종의 단호함마저 엿보인다. 내 생은 내가 정한다.

 

끝내는 거야 /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 / 그것이 가져다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이제 가장 멋지게 끝내는 거야 (P.212)

 

살아생전, 이승에서는 행복과 평온을 누리지 못한 그가 이제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며, 자신의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 더 이상 기타는 필요 없고, 기타 케이스도 버린다. 우리는 기타맨의 삶을 불행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길을 주도적으로 선택하였기에 삶에 있어 그는 당당하였다. 소시민이지만 그는 비극적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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