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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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3(<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주인공은 알리다와 아슬레이다. 두 연인이 고향을 떠나서 벼리빈[베르겐]으로 오기까지의 사연,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아슬레의 죽음, 이후 홀로 남은 알리다의 삶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포세 소설의 특징인 마침표 없는 문장, 쉼표로 쭉 이어 나가는 문장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표현 기법도 동일하다. 비교적 중후기에 발표한 작품이니만큼 초기작과는 달리 어색함과 맹목적 집요함을 덜고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유연성을 보이고 있어 형식과 문체에 내용이 매몰되지 않고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포세는 많은 것을 묘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단답에 그치거나 때로는 침묵으로 웅변하기에 시적이고 추상적이며 때로는 신비함마저 자아낸다. 독자는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언어와 행동의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데 외형을 좇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면의 흐름을 파악하는 건 다른 사안이다. 특히나 아슬레의 생각이 그러하다.

 

아슬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졌음을 느낀다, 중요한 건 내가 아냐, 크게 떠오르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바이올린 연주가 내게 가르쳐 주었어, 그걸 아는 게 바로 연주자의 운명이야, 크게 떠오르는 것, 나에게 그것은 알리다야 (P.77)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단연 사랑에서 찾고 싶다. 진부한 용어이지만 불멸의 주제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공간과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두 사람의 선택, 특히나 아슬레의 범법적인 행위에는 동조할 수 없다. 아슬레로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함을 우선시했겠지만, 보트하우스의 남자와 산파 노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노인과 조우하지 않았거나 차라리 노인의 요구대로 맥주 한 잔 사 주었더라면 교수형에 이르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한편으로 아슬레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과도 연결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호의적이지 않다. 두 연인은 거창한 걸 원하지 않았다. 단지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지만, 고향의 보트하우스에서도 내쫓기고 알리다의 집에서도 냉대받는다.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서두가 비 내리는 밤에 잘 곳을 찾아 헤매는 두 사람과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대치는 벼리빈이라는 도시의 비정함을 잘 보여 준다.

 

반지를 사러 서둘러 벼리빈을 향하는 아슬레와, 일말의 불안한 예감을 품는 알리다. 그가 반지를 사고 곧바로 돌아왔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반지조차도 힘겨운 형편에 화려한 팔찌는 무모한 동시에 무의미하다. 반지는 두 사람이 결혼한 사람임을 표시해주며, 특히 임신한 알리다를 위한 방비책이라도 되지만 팔찌는? 나중에 사도 괜찮은 건 바로 팔찌였음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무언가 더 귀하고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에 빠진 남성의 공통된 욕망이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은 비단 사마귀 수컷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도덕과 법률의 일탈, 눈부신 보화에 대한 현혹, 끝내 벗어나지 못한 금발 여인의 유혹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이처럼 <올라브의 꿈>은 근본적으로 두 연인의 사랑이라는 빛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동시에 품고 있다.

 

올라브는 춥다고, 덥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그저 앞으로 걸으며 비명과 외침을 듣는다 더는 아무것도 없어, 지금 존재하는 것은 떠오르는 것뿐이야,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어, 남은 것은 떠오르는 것뿐, 내가 떠오르고, 알리다가 떠올라, 하고 그는 생각한다 (P.185)

 

그럼에도 독자는 아슬레를 비난할 수 없으며 알리다에 대한 더 없는 연민과 동정을 품게 된다. 두 연인의 운명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며 알리다도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아슬레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귀하게 여기고 높이 떠받드는 것, 상대방을 위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고통과 슬픔이 아닌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조차 아깝지 않고 세상 전부를 적으로 하더라도 꺼리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슬레의 사랑을 더없이 깊고 진한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아슬레가 나는 당신 안에도 그리고 아기 시그발 안에도 존재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그러자 알리다가 그래,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라고 말한다, 그리고 알리다는 이제 아슬레는 오직 나와 아기 시그발 안에서 살아 있는 거야, 이제는 내가 살아 있는 아슬레야, 하고 생각한다, 그러자 아슬레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거기 있어, 난 당신과 함께,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라고 아슬레가 말한다, (P.232)

 

사랑은 세월의 경과도 비껴감을 <해질 무렵>은 보여 준다. 알리다가 오슬레이크와 재혼해서 낳은 딸 알레스는 이제 노인이 되었고, 죽은 어머니 알리다의 영혼을 집안에서 자주 맞닥뜨린다. 알리다는 오래전 스스로 바닷물에 들어간 걸로 알려져 있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이승과 집안을 떠나지 못함은 무엇일까. 작가는 알레스를 알리다의 현현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바다를 아슬레로 여기고, 아슬레의 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옛날의 알리다와 현재의 알레스. 여기서 과거는 현재와 연결되어 시간의 개념은 스러지며,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어둡고 그윽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지 않다. 새벽녘 어슴푸레하게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불분명하고 신비로운 시간, 세상 만물이 잠들어 있고 깨어나지 않은 고요함에 휩싸인 시간. 아슬레와 알리다의 사랑과 삶을 통해 작가가 보여 주는 정서는 이것이다, 백야(白夜). 독자는 포세의 글과 문장을 통해 시와 음악의 문학적 발현을 떠올릴 뿐만 아니라 그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아내는 북구의 지리적, 기후적 특색에 서서히 스며들게 된다. 그 속에서 시시비비를 분별하고 논한다는 짓은 어쩌면 덧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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