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리 원정기 - 중세 러시아의 영웅 서사시
최정현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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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이고리 원정기>를 소개한 강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중세, 러시아, 영웅 서사시라는 미지의 호기심을 당기는 조합인데다, 비로소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공> 또는 <이고리 공>의 원작임을 알게 되었다.

 

1. 편집자 해설 - 드미트리 리하쵸프

2. 이고리 원정기초판 간행본(1800)

3. 이고리 원정기대역 번역

4. 이고리 원정기해설 번역

5. 편집자 주

6. 부록

- 키예프 루시 공령과 전체지도

- 이고리 공의 원정도

- 공후 가계도

7. 번역을 마치며

 

이 책은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인 번역본 출판과는 전혀 다른데, 아무래도 처음 소개되는 작품인데다 전문연구자와 일반 독자 모두를 고려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12세기 중세 작품이므로 현대어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옮긴이는 드미트리 리하쵸프의 편집본을 저본으로 삼았기에 작품해설로서 편집자 해설을 수록하고 있다. 이어서 초판 간행본 원문을 영인본 형태로 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연구자를 위한 몫이다. 번역문도 대역 번역과 해설 번역이라는 두 가지 번역을 나란히 소개하는데, 대역 번역은 원문과 번역문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연구자를 위한 배려인 동시에 원전 번역의 충실성을 선호하는 독자를 위한 것이다. 솔직히 대역 번역만으로는 여러 가지 이해가 어렵기에 해설 번역은 관련 사건의 배경과 보충 설명 등을 곁들여 이해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부록의 지도와 가계도는 작품의 지리적 배경과,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여러 인물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품 원문이 길지 않고 해설이 충실하게 되어 있으므로 전반적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미처 간과했던 초기 러시아 역사를 파악하게 되는 유익한 효과도 있다. 특히 몽골의 침략 이전에 존속했던 키예프 루시국가의 존재, 작품 속에 무수히 표현되는 루시의 의미가 반드시 러시아를 뜻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는 점 등을 알게 되면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역사적 배경도 대강이나마 짐작게 한다.

 

공후의 이성은 / 열정으로 흐려졌다. / 위대한 돈 강에 대한 욕망은 / 흉조마저 외면해 버렸다. (P.115)

 

여기 이고리 공은 황금 안장에서 / 노예의 안장으로 옮겨 탔다. / 도시 성벽의 망루에는 좌절감이 흘렀고, / 기쁨은 사라졌다. (P.137)

 

이 작품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가 아니다. 이고리 공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이 아니다. 무모한 명예심에 매몰되어 자신을 치욕에 빠뜨리고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며, 조국을 적국의 말발굽에 휩쓸리게 만든 인물이다. 작가도 이고리 공 자체에 비판적 시각을 보인다. 작가는 이고리 공의 실패를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행위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균열되어 왔던 키예프 루시 국가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좌로 받아들인다. 이고리의 패배는 어쩌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자신들의 간교한 계약을 위해 / 이교도를 불러들여 / 루시 땅을 공격하도록 하고, 브세슬라브의 유산을 파괴하도록 했소. / 형제들간의 내분 때문에 결국 / 폴로베츠인들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오. (P.155)

 

이고리는 굳이 폴로베츠인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이미 전해에 키예프 루스 연합군은 폴로베츠인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해설 번역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그와 동생 브세볼로드가 원군 없이 독자적으로 적진 깊숙이 쳐들어 전투를 벌이는 건 무모한 행위일 따름이다. 이 점이 보로딘의 오페라와 차이점이다. 보로딘은 폴로베츠인들이 쳐들어와 이고리 공이 방어전을 벌이다가 포로가 되었다고 설정한다.

 

이고리 군의 궤멸 이후 폴로베츠인들은 국경 수비가 무너진 키예프 루시의 일대를 침략하고 약탈한다. 다른 공후들은 자신들의 성을 굳게 지키고 방관만 할 뿐 합심하여 유목민족을 퇴치할 방도를 세우지 않는다. 오로지 힘없는 민중들만 피해와 고초를 겪을 뿐. 여기서 시인은 격분하고 호소한다. 제발 힘을 합쳐서 외침을 물리치자고 말이다.

 

지나간 과거를 현재와 비교하며 이고리 공의 원정 만을 이야기하며 그를 일방적으로 칭송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고리 공의 원정에 대한이야기를 하며 루시 땅과 역사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P.22)

 

시인은 이고리 공의 실패한 원정을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는다. 그가 영웅이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의 실패가 담고 있는 의미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시의 형식으로 민중과 공후들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다. 반목과 불화의 결과가 개선되지 못한다면 폴로베츠인들의 침입은 감기에 불과하지만, 후일 치명적인 전염병이 들이닥친다면 그때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로. 역사는 몽골 제국의 실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대하는 인식의 차이는 러시아와 다른 나라 간 입장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러시아에서 보자면 이 시는 민중주의와 애국주의가 결합한 더없이 위대한 중세 고전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문화적 가치는 논외로 치고 말이다. 반면 12세기 전 세계적 시각으로 볼 때 과연 이 시가 편집자와 번역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듯이 대단한 예술성을 지닌 작품인지 문외한으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화려한 표지와 고급 용지의 사용, 충실한 내용과 번역, 부록 등 책 자체만 놓고 보면 잘 만든 책이다. 대중성 관점에서는 일반 독자가 접근하기 어렵고 크게 흥미를 느낄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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