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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7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창성 옮김 / 한길사 / 2021년 4월
평점 :
키케로의 <국가론>은 기구한 사연을 지닌 저서다. 씌어진 지 2천 년 가까이 지나서야 겨우 실물이 발견되었으며, 그나마도 이중으로 기록된 양피지 문서로 불완전하게 존재한다. 그나마도 원저 전체의 30% 내외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전 6권 가운데 후반부의 세 권은 누락과 판독 불가가 많아 원저의 본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키케로의 <국가론>과 <법률론>은 명백히 플라톤의 동명의 두 저서에 대한 오마주다. 플라톤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존경의 마음을 키케로는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혹자는 키케로를 플라톤의 아류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고대 로마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저작이라는 점, 단지 이론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정치가이자 사상가가 당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와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제1권의 주된 내용은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다. 스키피오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체 서술인데, 다른 인물들이 질의하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답변하는 방식을 취한다. 독자는 그것이 키케로의 사상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정체(正體)는 기본적으로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세 형태로 구분된다. 세 정체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지닌다. 따라서 어느 하나만의 요소를 따르기보다는 삼자의 적절한 혼합이 보다 이상적인 체제라고 본다.
세 가지의 원초적인 국가의 종류 중에서, 내 생각에는 왕정이 훨씬 뛰어난 것이기는 하나, 국가의 세 양식이 평균화되고 적절히 절제된 것이 왕정 그 자체보다 앞설 것입니다. (P.159)
제2권은 고대 로마의 정치사를 전반적으로 훑고 있다. 로마는 왕정에서 출발하였고, 타르퀴니우스를 마지막으로 공화정으로 전환하였다.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가 혹심해지고 참주정이 출현하자 평민들이 반발하였고 민회와 호민관의 직위를 인정해 주는 타협안이 허용되어 키케로 당대에까지 이르렀다는 개요다. 키케로가 로마사를 예시로 든 까닭은 앞서 말한 세 정체의 혼합에 이르는 과정이 로마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본 탓이다. 즉 스키피오 당대 로마 정치체제야말로 가장 이상적이고 우월한 체제라는 인식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사실 나는 어느 국가도 체제 면에서나 질서의 측면에서나 규율의 면에서 우리 선조들이 조상들로부터 처음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물려준 국가와 비교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판단하고 감지하고 있으며 이를 명백히 주장하고자 합니다. (P.160)
키케로가 자신의 시대보다 더 이른 시기를 이와 같이 이상으로 생각한 것은 당대의 정치 현실이 이상에서 벗어나서 타락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귀족 중심 공화정의 안정성이 흔들리며 평민들의 발언권이 확대되고 호민관의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키케로는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우민(愚民) 정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태도다. 이 작품에서도 계급차별을 정당화하는 의견과, 개혁을 추진하여 귀족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적개심 어린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 평민, 즉 인민은 국가의 필수적 구성 요소이지만 어디까지나 계급 체제의 가장 아래에서 지배를 받으며 국가를 지탱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존재다.
(라일리우스) 어떻게 대중이 주인노릇하는 상태 속에 국가라는 이름이 생기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오. [......] 오히려 인민이 한 명의 사람처럼 모일 때는 참주나 다름없는데, 이 경우가 더욱 무서운 법이지요. 왜냐하면 인민의 모습과 이름을 흉내 낸 것보다 더 잔인한 짐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P.255-256)
근원으로 돌아가 국가의 출현 배경에 대해서도 키케로는 논의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탄생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유사한 개념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라는 결속체를 이루며, 기초 질서로서 법에 대한 동의와 지배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 요건이다. 국가 존속에 필수적인 법에 대해서는 <법률론>에서 본격적으로 법철학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에서도 역시 법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자연에 부합하며 올바른 이성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최고의 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최상의 정치가 저절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하드웨어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구현하는 소프트웨어가 바로 정치가의 역할이다. 제5권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툴리우스는 자신의 <국가론>에서 국가의 통치자는 최상의 위인이며 가장 학식이 많아서 지혜롭고 정의로우며 절제하고 연설을 잘해 평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마음에 담은 비밀을 유창한 연설로 쉽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P.285)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워낙 형편없고 비정상적인 작태를 많이 보아서인지 이상적인 정치가란 굉장히 낯설고 공허하게 들리지만 어쨌든 필요악이라고 할지라도 정치가란 존재는 필요하다. 정치가가 자신의 역할 수행을 위해 최대로 노력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권력욕, 금전욕, 유권자에 의한 배척? 아니다. 키케로는 ‘명예’라고 주장한다. 이상적인 국가를 이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키를 잡는 데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라는 것이다. 선조들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서 하였듯이 참다운 정치가라면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의 평가도 귀 기울이게 마련이다. 무덤 속에서조차도 세인들이 자신의 정치 업적에 대한 찬사를 듣는다면 더없이 행복함을 느끼리라.
(스키피오) 꿈에 관해 언급하면서, 부수적으로 그는 하늘에서 국가들의 선한 통치자들을 위해서 더 안정되고 생기 있는 종류의 보상이 간직되고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P.304)
키케로에게 있어 정치는 고답적 학문의 영역이 아니다. 선과 덕의 이론 전개도 의미가 있지만 이를 직접 실천하는 것은 세계와 사람에 미치는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달리 그의 <국가론>이 더욱더 실제적이고 절절함이 배어있음은 정치가로서 자신의 이상과 꿈이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철학자들이 언변으로 겨우 몇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을 대권과 법률상의 처벌에 의거해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자야말로 박식한 사람들보다 더욱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박식한 자들의 언변이 아무리 철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공의 법과 관습에 의해서 선하게 구성된 국가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인가? (P.102)
옮긴이는 원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충실한 해설 서비스를 제공한다. ‘키케로를 통해 본 고대국가의 이성과 현실’이라는 작품 해설과, 로마의 관직·제도 일람이 그것이다. 특히 작품 해설에서 <국가론>의 발견 비사, 키케로의 사상적 기반인 스토아학파와, 그가 이상적인 인물군으로 그렸던 스키피오 서클을 소개한다. 아울러 키케로 정치사상의 한계와, 스키피오 서클의 실체 등 비판적 견해도 서슴지 않는다. 독자가 일방의 시각에 매몰되지 않고 키케로 사상의 비판적 수용을 하기를 옮긴이는 기대한다. 본질적으로 키케로는 혼란스러운 당대에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주의자다.
그[키케로]가 회복하기를 바랐던 것은 ‘권위를 지닌 질서’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사회적 안정성이 보장되고 재산과 신분에 대한 존중이 유지되는 국가였다. (P.80)
내용(번역과 해설)과 편집, 만듦새가 전반적으로 잘 어우러진 좋은 책이다. 완전한 원본이 아닌 상태에서 자칫하면 난삽함으로 가독성을 저해할 수 있었을 텐데, 옮긴이의 감사 인사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집과 교정에 심혈을 기울였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