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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알레스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욘 포세 지음, 정민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10월
평점 :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욘 포세가 2003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해설을 제외하면 100면이 살짝 안 되는 분량이니 중편소설에 해당한다. 입센의 뒤를 잇는 극작가라는 평가에서 유독 궁금증이 생겼는데 일단 소설부터 읽기 시작한다.
‘편집자 일러두기’는 이 작품에 마침표가 없다고 밝힌다. 독자들이 편집상의 실수로 오해할까 봐 친절히 알려주는 셈이다. 이것이 욘 포세의 글쓰기 스타일인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 작품에는 마침표가 없다. 모든 문장은 오로지 쉼표로만 진행되며 가끔 물음표 정도는 허용한다. 문장 구조상 불가피하게 마침표가 등장해야 순간에는 아예 문장부호를 넣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하고 의식적인 행위는 작가가 분명 무엇인가 의도하는 것인데 과연 무엇일까?
필립 그래스라는 현대음악 작곡가가 떠오르는 까닭은 그의 미니멀리즘 작법과 욘 포세의 글쓰기가 유사해서다. 이 작품에서 반복을 생략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의자에 누워 있다. 남편 어슬레가 영원히 떠났고 오랜 시절이 흘렀어도 그녀는 여전히 남편을 생각한다. 싱네의 생각 속에 어슬레는 계속 살아 있다. 항상 보트를 타고 피오르드에 나가기를 좋아하던 남편, 창가에 서서 밖의 어둠을 응시하던 남편, 파도가 거칠어 배를 타지 않겠다고 했던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본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장작을 하나 들고, 허리를 굽히고 그것을 난로에 집어넣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자신을 본다, 현관문이 열리고, 문에는 그가 서 있다, 그리고 그가 방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는다. (P.19)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미소 짓는다, 그녀는 그가 현관문으로 나가 등 뒤에서 문을 닫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의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본다, 그녀는 왜 항상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P.54)
작품의 시선은 싱네에서 어슬레로 다시 싱네로 계속 옮겨 다닌다. 어슬레는 언제나 밝은 불빛을 배경으로 창가에 서 있던 아내를 떠올린다. 사라지던 밤 그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내 다시 집 밖으로 나온다. 다시 돌아가려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싱네와 집에 안주하지 못하는 어슬레의 생각은 무엇인가. 싱네의 생각 속에 어슬레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싱네를 생각하고, 싱네는 그런 어슬레를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잃어버린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회상, 그리고 상실 전 부부간의 고독한 모습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알레스를 등장시킨다. 그는 누구인가? 어슬레의 고조할머니. 알레스를 필두로 싱네와 어슬레의 회상은 머나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바다에 빠진 증조할아버지 크리스토페르, 그의 아들이자 만에 빠져 익사한 할아버지 어슬레로 이어진다. 어슬레 집안은 바다와의 친연성 못지않게 익사의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어슬레의 사라짐은 집안의 내력이려나. 회상 속에서 선조들을 바라보며 엇갈리고 때로는 마주치는 싱네와 어슬레. 이로써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지 않고 더불어 굴러가며, 어슬레의 익사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저 사람은 알레스, 그는 생각한다, 그는 본다, 그는 안다, 저 사람은 알레스, 저 여자는 알레스야, 그는 생각한다, 그는 안다, 자기 고조할머니라는 것을, 저 여자는 알레스, 그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더 정확히 다시 말하면 일곱 살 때 죽은, 여기 만에서 익사한 그녀의 손자 어슬레의 이름을 딴 것이다, (P.39)
싱네는 수십 년을 홀로 빈집을 지키며 남편을 회상한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내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싱네는 다만 떠나간 남편의 부재와, 그를 향한 끈을 놓지 못하는 자신을 반복하여 의식한다. 언뜻 보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사랑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고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어슬레는 바다로 향하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고, 싱네는 어두운 창밖을 늘 바라보는 남편에게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을 지닌다.
작가는 문장부호, 문장 반복, 남편과 아내 간 시점의 전환 외에도 메타 관찰자를 의도적으로 추가한다. 싱네는 회상 속에서 남편만을 관찰하지 않는다. 남편을 바라보는 과거의 싱네를 지금의 싱네가 지켜본다. 과거의 싱네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관찰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과거의 어슬레와 지금의 싱네가 함께 과거의 싱네를 바라보며, 지금의 싱네는 그러한 어슬레와 싱네를 동시에 의식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싱네를 보고 듣는다. ‘나’가 등장하는 게 작품의 가장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점이 시사적이다.
나는 방의 그곳 의자에 누워 있는 싱네를 본다, (P.3)
그리고 그녀는 그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배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녀는 양손을 모은다, 그리고 나는 싱네가 말하는 걸 듣는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P.101)
이 작품은 철저하게 고독하다. 현실의 싱네는 외롭고, 회상 속 싱네와 어슬레도 서로에게 근원적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어둠과 빛 속에서. 남편의 조상들 사이에 간혹 드러나는 흐뭇한 장면도 짙은 구름 속 순간적 햇살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과 회상으로 일관할 뿐 현실은 아무런 사건을 담고 있지 않다. 작품을 이끌고 지탱하는 힘은 전적으로 생각의 끈질김에 있다. 이 끈을 놓치면 큰일 난다는 듯 작가는 인물에게 생각을 밀어붙인다. 우리네 인생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애매함에 휩싸여 있지만, 그럼에도 의식은 단절되지 않으며 시공간을 넘어서 무한히 계속되며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쉼표로만 문장을 이어가고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