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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양장)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한은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수록작>
만에서
가든파티
죽은 대령의 딸들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
어린 소녀
마 파커의 일생
현대식 결혼
항해
브릴 양
첫 번째 무도회
노래 수업
낯선 사람
은행 휴일
이상적인 가족
하녀
<가든파티>로 유명한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짙은 연둣빛의 양장본 표지를 보면서 떠올렸던 이미지는 로나 세이지의 <서문>을 읽으면서 불길함에 휩싸였고 하필 작가의 가장 긴 작품인 <만에서>를 읽을 때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아, ‘가든파티’와 ‘캐서린 맨스필드’의 어감과는 전혀 상극으로 작가는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은 스타일의 작품을 썼던 것이다. 이 소설집은 그녀의 마지막 단편집이다. 그녀만의 작풍을 확립한 그녀의 농익은 작품세계를 한껏 풀어놓았으니 나처럼 어설픈 독자가 당혹감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수박 겉핥기지만 생소하면서도 뇌리를 살짝 건드리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맨스필드 작품의 매혹 포인트라면 정말 좋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맨스필드 문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남성(아빠, 남편)의 배제 또는 약화다. 그녀의 세계에서 남성은 항상 주변적이다. 가계를 꾸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있거나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있으면 다른 데 눈을 돌려 여성 주인공을 심란하게 만들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인 보샹 가를 탈출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그녀가 평생 헤매었던 결혼 생활과도 관련 있으리라. <만에서>의 가장 스탠리는 아무도 그에게 공감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없다. 처제 베릴은 한층 더하다.
베릴은 하고 싶은 것을 이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들을 방해할 남자가 없었다. 이 완벽한 하루가 그들의 것이었다. (P.44)
<죽은 대령의 딸들>에서 대령은 죽어서도 서랍장 안에서 딸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상적인 가족>의 니브 씨는 늙은 스탠리와 다를 바 없다. 거미처럼 비쩍 마른 채 정작 가족에서 잊히고 소외당하는 가장의 모습. <항해>는 언뜻 이와 관계없어 보이지만, 페넬라는 할머니와 함께 아빠를 떠나 할아버지에게 간다. 할아버지처럼 나이 든 노인은 부정적 인식의 남성과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작가는 냉혹하다. 그녀는 다른 작품에서 늙은 노인이 젊은 가정교사 아가씨에게 치근덕대는 장면을 교묘하게 다룬다.
그녀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죽음과 친연성을 지닌다. 사람에게 있어 죽음은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유독 맨스필드의 서사와 인물은 죽음을 달고 다닌다. 작가의 소설들에서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나 진정으로 밝고 화창한 작품이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는 가족사에서 남동생의 사고사 영향이라고 귀인 하기에는 곤란하다. 그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봐야 하리라. <가든파티>에서 파티를 망칠 뻔한 사건은 대문 밖 한 남자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다. <죽은 대령의 딸들>은 당연하고, <마 파커의 일생> 역시 마 파커는 사랑하는 손자의 죽음에 맞닥뜨린다. <항해>의 페넬라는 엄마를 잃었다. 죽음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소설이 바로 <낯선 사람>이다. 배를 타고 오는 아내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해먼드는 이제 더는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없다. 아내의 팔에서 죽은 한 남자로 인해 그는 아내를 죽음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들의 저녁을 망쳤다! 둘만의 시간을 망쳤다! 그들은 다시는 둘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P.263)
맨스필드 소설의 결말은 항상 모호하다.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이지만, 달리 말하면 작가는 독자에게 명확한 길 또는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간에는 모호한 문구로도 공감대가 통할지 모르지만 독자의 관점에서는 작가가,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머리를 굴려 추론해야 하는 고달픔이 따른다. <만에서>에서 케지어와 페어필드 노부인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한 게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잊는다. 헤리 켐버가 베릴에게 던진 질문은 공허하게 울린다.
“인생이, 인생이...”
그녀가 더듬었다. 하지만 인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로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정말 그렇지?”
로리가 말했다. (P.114)
<가든파티>에서 인생을 설명하려고 헛되이 애쓰는 로라를 오빠 로리는 이심전심으로 이해한다. 독자만이 글밖에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진리는 원래 모호하다고 옹호할 수 있지만, 이는 진실을, 또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묘사라고 바라볼 수 있다. <죽은 대령의 딸들>의 조세핀과 콘스탄티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주체적인 삶을 걸어갈 기회를 얻지만, 무슨 말을 할지 서로 잊는다. <마 파커의 일생>에서 고된 인생을 살아온 마 파커는 울고 싶지만 억지로 울음을 참는다. 감정을 여과 없이 배출해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을 기회를 마 파커는 스스로 놓치고 있다. 그만큼 삶에 진솔하지 못하다.
“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나갈 거야. 윌리엄에게는 나중에 편지를 쓰지 뭐. 다음에,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분명히 쓸 거야.” (P.203)
<현대식 결혼>의 이사벨은 어떤가. 그녀는 남편과 소원해진 관계를 복구할 절호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나중에 다음으로 미룬다. 사람 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진실의 순간에 침묵하거나 망설이는 인물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든파티>의 로라 역시 파티 취소 의견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나중에 생각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회피해 버린다. 이 작품집에서 유일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인물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의 앤이다.
이 모든 것을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거칠게 말하자면 삶이란 모호하고 다층적이어서 사람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네 삶에는 항상 모순과 역설이 가득 차 있고 개인적 좋고 싫음과 무관하게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빛과 어둠처럼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울린 삶은 한바탕의 연극 무대와도 같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브릴 양>의 브릴 양이 깨달았듯이. 그렇게 보면 <노래 수업>에서 전보를 받기 이전의 메도스 양과 이후의 메도스 양의 표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첫 번째 무도회>에서 기대와 기쁨에 부풀어 있던 라일라가 늙고 뚱뚱한 남자로 인해 의기소침하였지만 이내 청춘답게 다른 파트너와 신나게 춤추면서 늙은 남자를 잊는 것 역시 마땅한 이치다.
그럼에도 인생의 종착지는 죽음이기에 삶은 결코 눈부시게 화창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게 <브릴 양>이라면 지나칠까. <가든파티>의 화려함은 일말의 그림자도 없다고 해야 할까. <만에서>의 스탠리 못지않게 린다의 무기력함은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