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837년판 초판본 표지 디자인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박형규 옮김 / 써네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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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은 소설가, 극작가이기에 앞서 시인이다. 어쩌면 푸쉬킨의 본령은 시인이라고 좋다.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운문체이며,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한 주요 희곡들도 모두 운문체로 쓰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푸쉬킨의 주요 서정시를 수록하였다. 서정시인으로서 푸쉬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서사시인으로서 푸쉬킨은 앞서 읽은 책에 나타나 있다.

 

애국, 사랑, 시골(유배지 포함), 자유.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머릿속에 떠오른 일관된 주제어다. 초창기의 시에는 애국 의식이 엿보이는데, <싸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은 최초로 인정받은 작품으로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가 전면에 나와 있는 시다.

 

시인의 애국심은 곧바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충돌하며 이후 체제 비판적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 대가로 시인은 러시아 남부 카프카즈 및 크림반도 지역으로 유배당한다. 간혹 보이는 러시아 남부의 이국적 풍광을 다룬 작품의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흐르는 구름 엷어지고>는 유배지 크림 지방의 인상을 떠올리며, <바다에 부쳐>는 흑해 바다를 추억한다.

 

이때 접하는 카자크 민족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니,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스첸카 라진의 노래> 같은 시는 물론이고, <푸가초프 반란사><대위의 딸> 등 카자크 반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스첸카 라진과 푸가초프 등 러시아 정부 시각에서는 사악한 반란 수괴가 그의 작품에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을>의 전반부는 시골, 전원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여 독자는 상쾌한 마음을 품는데, 후반부는 완전히 일변하여 전후의 극적 대비가 인상적이다. 시인은 시골 마을의 지주와 귀족들이 가하는 압제 광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농노 제도가 사라진 이상적인 시골 마을을 꿈꾼다.

 

무엇보다 자유, 그리고 사랑은 아마도 푸쉬킨이 가장 중점을 둔 주제가 아닐는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한 시인의 짧은 삶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려면 중요한 키워드다. 푸쉬킨의 유배로 점철된 삶은 그의 반체제적, 반정부적 태도와 문학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데카브리스트와의 친분은 결국 그의 삶을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황제들이여, 이제 배우라- / 형벌과 포상, / 감옥과 제단, 그 어느것도 / 그대들의 믿음직한 방책이 되지 못함을. / 미더운 법의 보호 아래 / 먼저 고개 숙이라, / 민중의 자유와 평안이 / 왕관의 영원한 보초가 되리라. (P.54)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게 된 계기가 된 시 <자유>의 일부다. 민중의 편에 서서 황제를 비롯한 권력층을 맹공하고 있으니 그들의 분노를 사고 위험인물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체제는 견고하고 황제의 권력은 막강하다. 기대를 걸었던 민중은 계몽과 투쟁의 길에 동참하길 망설인다. 견디다 못한 시인은 절망하고 그네들을 향한 실망과 질타를 퍼붓는다(<자유의 외로운 씨를 뿌리는 사람인>). 이 또한 시인의 자유를 향한 염원의 크기를 반증한다. 친구 챠다예프에게 보낸 시(<챠다예프에게>)에서 압제 속에서도 자유의 희망을 놓지 않는 시인의 마음을 여전히 헤아릴 수 있다.

 

푸쉬킨의 삶을 들여다볼 때 그가 나탈리야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가 요절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시(<고백>)를 남긴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다니. 아마도 그의 삶은 평범한 행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하니, 보론쏘바 총독 부인, 안나 케른에게 바치는 시(<불태워진 편지>, <명예의 희구>, <안나 케른에게>)를 보면 아름다운 유부녀를 연모하는 시인에게서 훗날 자신의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다. 자기 아내의 부정에 대한 근심과 모욕감, 질투와 분노. <그대는 용서하겠는가, 질투에 찬 내 공상>은 일종의 예언시라고 할 만하다.

 

시인은 다짐하고 결심한다. 삶이 자신을 속이더라도, 사랑의 불길에 자신을 태우지 않도록 경계하고 조심하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훗날 독자는 이 시들을 되뇌면서 시인의 불행한 역설적 삶을 회상할 따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어라. (P.126, (삶이 그대를 속이지라도))

 

아니다,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도 없고 감히 해서도 안된다, / 사랑의 흥분에 분별없이 몸을 내맡기는 것을. / 내 마음의 평화를 굳게 지키리라, / 사랑의 불길에 마음을 불태우게 하거나 무아경에 빠지도록 하지 않으리라. (P.219, ...에게)

 

사랑과 자유를 희구하였으나 둘 다로부터 배척받은 시인은 모두를 거부한다. 그의 주위에는 자신과 사상을 같이할 동지도 없으며, 가정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주변인,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러시아 남부로 유배당하였을 때 겪었던 것처럼. 그때 시인은 자신을 동향으로 유배되었던 오비디우스와 동일시하지 않았던가. 낯선 곳을 정처 없이 방랑하다가 타지에서 숨을 거두고 마는.

 

내 앞에는 목적이 없다- / 가슴을 공허하고 이성은 무위롭다, / 생활의 단조로운 소음이 / 우울함으로 나를 괴롭힌다. (P.176, (1828526))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지 않았더라도 푸쉬킨은 제명을 누리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삶의 의미와 사랑을 잃은 시인에게 더 남은 게 무엇이며, 삶을 지탱할 의욕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 책은 2009년에 초판,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는데, 간간이 고색창연한 표현과 어휘가 보여서 요즘 시대의 산뜻한 느낌은 없다. 1세대 러시아문학 번역자인 옮긴이를 생각하면 예전 번역본을 그대로 재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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