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여인과 걷다 삼국유사 시리즈
정진원 지음 / 맑은소리맑은나라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고대사를 다룬 대표적인 두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 중 확실히 후자의 대중적 인기가 월등히 더 높다. 모 출판사는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포함할 정도니까. <삼국유사>는 순수한 역사서 외에도 그 안에 수록된 시, 설화 등으로 인한 흥미와 문학사적 가치도 인기를 높이는 일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유사>의 여러 인물과 이야기 중 여성에 초점을 두고 파헤쳐 소개하고 있다. 여성 대상 불교 잡지에 연재하였던 연유로 불교적 내용과 함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있음을 유념하고 읽으면 도움이 된다.

 

전체 개의 장으로 나눠서 첫째 장은 삼국유사 삼대 미녀인 수로부인, 도화녀, 선화공주 소개와 사금갑 고사의 재해석을 다룬다. 둘째 장은 개국시조 어머니들인 유화부인, 알영부인, 허황후를 부각한다. 셋째 장은 성모와 국모 격에 해당하는 선도산 성모, 지소태후와 신라의 세 여왕을 재조명한다. 넷째 장은 고승을 뒷받침한 여인들이며 마지막 장은 관세음보살을 집중 조명한다.

 

두 편의 향가 창작의 배경이 되었던 수로부인의 정체를 추적하면서 그녀와 신적 존재의 접촉은 단순한 납치 행위가 아니라 신령함을 얻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새롭다. 서동요로 유명한 선화공주도 일방적인 뜬소문과 피해의 운명을 개척하여 당당히 백제 왕비로 거듭나는 모습을 부각한다. 이처럼 저자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여 새로운 관점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주인공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스쳐 지나갔던 역사 속에서 새삼 반짝이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 크다.

 

유화부인은 단순히 주몽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역사 속의 대모신이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은 사실상 신라 건국의 쌍두마차였다고 강조한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어린 진흥왕의 섭정이었음과 미실을 능가하는 화려한 행적을 통해 신라의 국모였음도 웅변한다. 선덕여왕의 뛰어남에 관한 확인과 함께 무시당하고 폄훼된 진덕여왕과 진성여왕의 실체가 사서 기록과 다를 가능성도 제기한다.

 

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며 유실되거나 영웅성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여성의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었으니. 이를 역사상의 자연적 흐름으로 이해할 건지 아니면 남성의 고의와 음모가 야기한 날조와 왜곡 행위로 간주할 것인지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후자에 가깝다. 저자가 되풀이하는 문구가 있다. “<삼국유사> 속에는 훌륭한 남자 뒤에 항상 열 배 뛰어난 여인이 숨어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실 것.” (P.137). 연재 대상을 지나치게 고려하였던 때문인지 아니면 저자의 원래 성향인지 모르겠으나 저자는 잊히고 무시된 여성 인물의 제자리를 찾는 데서 한발 나아가 역할과 중요성을 더욱 힘주어 말한다, 때로는 무리라고 할 정도로.

 

선덕여왕의 일화인 여근곡과 옥문지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과 성적 해석이 결부되어 일반인에게도 제법 알려진 일화다. 저자는 여왕의 탁월한 정치력을 강조하고자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어렵다. 이 사건은 수천 명의 백제 군사가 아무도 모르게 신라 국토를 횡단하고 도성 가까이 급습하려고 매복해 있다는 게 핵심이다. 그토록 당시 신라의 국방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해결 안 되어 수모를 받으면서도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겠는가. 진덕여왕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평정하고 나당 동맹을 맺은 뛰어난 정치력을 지닌 과소 평가된 여왕으로 힘주어 말하지만, 갑자기 왕위에 오른 일개 여왕이 무슨 대단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진흥왕의 초반 업적을 모두 지소태후의 것으로 돌리는 것과 비교하면 모순된 태도에 가깝다. 진덕여왕은 역시 허수아비로 보는 게 맞다. 하물며 진성여왕은? 그녀가 능력자라면 쇠망하던 신라를 중흥시켰을 테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보여주었다.

 

박혁거세에 가려 이름만 남아 있던 알영은 단순히 알영부인이 아니라 신라 건국의 이성(二聖), ‘알영여왕으로서 당당히 신라역사를 열었던 그 위상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 (P.62)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다양한 변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투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애닯게 죽었는데 성모나 신모가 되었으면 좋겠고 망부석이라도 남아 기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P.89)

 

알영부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 혁거세와 알영을 낳은 선도성모와 서라벌의 선도산 성모,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의 주인공의 연관 관계는 흥미롭다. 망부석이 된 줄 알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이야기 갈래에 따라 여러 가지 운명으로 달라지는 대목에서는 설화의 속성과 함께 당대인의 바람도 엿볼 수 있어 유익하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지소태후의 대단한 행적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신라 불국토 프로젝트를 위해 애쓴 미실과 선덕여왕, 그리고 자장율사의 이야기는 새롭다. 의상대사, 원효대사에, 김유신의 남매 이야기는 원래 유명하지만.

 

신라의 본격적인 여왕 제도 시행에는 지소태후의 섭정이라는 막강한 성공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지소는 신라의 왕과 여왕을 길러낸 명실상부한 신라의 어머니, 신라의 국모인 것이다. (P.99)

 

저자가 <삼국유사> 속의 자잘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다듬어서 세상에 소개하는 까닭은 스스로도 밝혔듯이 풍부한 문화유산 콘텐츠로 자리 잡고 이것이 문화적 한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임은 프롤로그와 본문 속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지자체의 문화콘텐츠, 그 중에서도 역사문화 콘텐츠를 새롭게 발굴하거나 조성할 수 있고 그 내용을 연관 지을 수 있는 K-Culture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K-Culture의 바탕이 삼국유사와 같은 K-Classic에 있음을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P.21)

 

확실히 이 책을 보면 <삼국유사>에 이런 인물 또는 이야기가 있었나 싶은 소재를 저자가 잘 소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읽은 지 한참 된 <삼국유사>를 다시 정독해 보고 싶은 욕구마저 생길 정도다. 이 책의 미덕이 부차적 요인으로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