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와 아도니스 셰익스피어 전집 33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크리스의 능욕>이 고대 로마의 전설적 역사에 기반하였다면,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지은 1,194행의 장편 이야기 시다. 비너스[아프로디테]과 그의 젊은 연인 아도니스의 사랑, 그리고 아도니스의 불행한 죽음과 꽃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시인이 원작에 커다란 변형을 주어 이야기 전체의 틀을 뒤바꿔 놓았다는 사실이다. 애정이 넘치는 연인 사이였던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관계가 여기서는 연인이라고 간주하기 어려운 처지다. 비너스는 끊임없이 아도니스에게 구애하지만 아도니스는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고 달아나려고 애쓴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신이지만 욕정에 무관심한 아도니스의 눈에는 그저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훼방꾼. 아마 평범한 인간 여성이었다면 분연히 떨치고 가버렸겠지만, 여신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도니스가 딱할 따름이다.

 

시인은 비너스와 아도니스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되묻고자 한다. 아도니스가 아직 어려서 사랑을 모른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가 비너스의 애정을 거부하는 까닭은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과 비너스가 요구하는 사랑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해서다.

 

비너스는 미의 여신인 동시에 사랑의 여신인데, 여신이 대변하는 사랑은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에 가깝다. 비너스는 남녀의 짝을 짓고 성욕을 통해 출산을 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므로 여신에게 있어 고매한 정신적 사랑은 무의미하다. 육체적 교접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비너스의 본질이다. 비너스가 집요할 정도로 아도니스를 쓰다듬고 껴안으며 열렬한 키스를 갈구하는 연유가 이 때문이다.

 

그녀는 아도니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그는 얼굴을 찡그려 / 꾸짖기 시작하나, 그녀는 곧 입술을 포개고 / 키스로 사이사이에 욕정에 허덕이며 말하니, (P.14)

 

참을 수 없는 격정은 그녀의 하소연을 막으며, / 끓어오르는 욕정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오. (P.29)

 

여신이 아도니스에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사랑은 가벼운 것이고 아름다움의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등 정신적 교감보다는 육체적 의미를 중시한다. 특히 아도니스를 사슴에, 자신을 사슴동산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거침없이 구사한다.

 

여신과 아도니스의 극명한 시각 차이는 고삐를 끊고 발정 난 암말을 쫓아 달려 나간 준마를 바라보는 장면에 있다. 말을 잃어버려 친구들과 사냥에 나설 수 없게 된 아도니스는 짜증이 날 뿐이다. 반면 본능으로서 욕정의 힘의 위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므로 비너스의 눈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신은 아도니스에게 오히려 준마에게서 배우라고 간청할 정도다. 이에 대한 소년은 반응은 냉담할 따름이다. 여신의 뜨거운 구애에 그는 차갑고 멸시하듯 응대하며 경멸의 웃음을 짓는다. 여기서 비너스의 사랑과 아도니스의 사랑은 서로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입술은 정복자며, 소년의 입술은 굴복하니, / 승리로 오만한 자가 바라는 바 몸값을 치르네. / 그녀의 독수리 같은 탐욕은 한껏 몸값을 높이며, / 그의 입술의 풍요한 보화를 바닥까지 빨아들이네. (P.56)

 

비너스의 연기에 깜빡 속아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여신은 소년을 품에 안고 입술을 탐닉하는 데 성공한다. 정복의 기쁨에 한껏 오만해진 여신을 묘사하는 시구에서 문득 남녀의 성관계에서 여성을 정복하였다는 우쭐함을 과시하는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신적 교감에 바탕을 두지 않은 육체적 교합은 양자 간의 불평등한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억측일까.

 

아도니스는 끝내 비너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신의 위력에 복종할 뿐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여신을 모욕하는 듯한 말을 할 정도이다. 이어서 아도니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참다운 사랑을 설파한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관계임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마오, 사랑은 천상으로 사라졌으니, / 이 땅에서 땀으로 얼룩진 육욕이 그 이름을 빼앗은 때문이라오. / 사랑이라는 수수한 모습으로 차리고, / 음욕은 신선한 아름다움을 먹어치워, 추한 죄로 더럽혔소. (P.77)

 

사랑은 포식하지 않으나, 욕정은 과식해서 죽는 것이라. / 사랑은 온통 진실이나, 욕정은 허위로 차있으니. (P.77)

 

여신의 무서운 예언에 무신경하게 아도니스는 멧돼지 사냥을 떠나고 불행한 예견은 적중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탄식과 절망으로 다가오고 결실을 보지 못한 사랑의 여신은 사랑 전체에 저주의 씨앗을 뿌린다. 앞으로 사랑의 기쁨은 더 큰 슬픔을 동반하며, 사랑은 불화와 불평불만을 조성하리라고.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너스의 과도한 애욕을 비판하는가 아니면 아도니스의 사랑의 무지함에 한숨짓고자 함인가. 흔히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결합에 있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비너스가 좀만 덜 아도니스에게 추근거리고 은근한 애정을 표현했더라면, 아도니스가 고삐 끊은 준마의 사례에서 육체적 욕정이 추잡하고 거부할 본능이 아니며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으로 깨달았더라면.

 

이상은 이상에 그칠 뿐 그렇기에 현실에서 이상은 오히려 불가능에 가깝다.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팽팽한 대치와 끝내 아도니스의 떠남과 죽음으로 귀결되었듯이 말이다. 다만 이로써 후대 인간 세상은 사랑의 불씨가 빚어내는 온갖 변덕과 기만, 인색과 의심, 불안과 비참의 파노라마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니 가엾은 인간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