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리스의 능욕 셰익스피어 전집 3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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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가 아닌 시인 셰익스피어가 고대 로마의 여인 루크리스[루크레티아]에 관한 유명한 사건을 다룬 총 1,855행의 장편시다. 옮긴이에 따라 <루크리스의 겁탈>, <루크리스의 강간> 또는 <루크레티아의 능욕>으로 표제가 조금씩 차이 난다. 표현을 달리하지만 가리키는 내용은 동일하니 루크리스가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이는 바로 왕자 타퀸[타르퀴니어스]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자에게 아름다운 여성이 겁탈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남달리 의의를 가지는 까닭은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가 이를 계기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런 유형의 시를 이야기 시라고 한다. 시의 분류 체계에 이야기 시가 따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서사시와 같이 어떤 사건 또는 이야기를 시 형식으로 풀어낸 성격이라고 보면 무방하리라. 시인은 친절하게도 사건의 줄거리도 작품 서두에 따로 마련하여 작품 배경에 낯선 이들을 배려하고 있다. 시는 내용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은 욕정에 눈먼 왕자 타퀸이 장군 콜라타인의 집을 방문하여 부인 루크리스를 겁탈하기까지의 경과를, 후반은 능욕당한 루크리스가 정신적 방황을 겪는 모습과 남편에 복수를 요구하며 자결하는 장면을 그린다.

 

사건 자체가 워낙 단순하고 분명하기에 시인으로서는 배경 묘사 또는 쓸데없는 주변 인물의 행동을 등장하여 시를 길게 이끌어갈 수 유혹에 빠질 수 있었으련만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의 내면 묘사와 행동에 집중한다. 외관상 명명백백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인물의 사고와 심경은 어떠하였을까를 상상하고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그로 인해 단순한 드라마는 더할 나위 없이 극적인 격정을 품게 된다.

 

욕정에 눈이 먼 타퀸은 이런 위험을 범하려 하니, / 욕정을 치르려고 그의 명예를 걸어야하고. /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자신도 버려야만 하오. (P.24)

 

그의 마음은 욕정과 공포 사이에서 크게 동요하오. / 한쪽은 달콤하게 아첨하고, 다른 쪽은 무섭게 겁을 주고, / 정직한 공포는 추잡한 욕정의 매력에 홀리오니. (P.25)

 

루크리스에게 매혹당한 타퀸은 욕정에 이성을 놓는다.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루크리스가 장군 콜라타인의 아내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뒷수습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부인이 타인에게 정절을 빼앗긴 사실을 공개하는 치욕을 감내할 것인가, 쉬쉬하면서 드러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면서 숨길 것이라고 예단했으리라. 그는 루크리스의 외모만 관심을 두었지 그녀의 정절과 지조, 올곧고 대범한 성품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아무리 그렇더라도 막 나가는 폭군이 아닌 이상 평민이나 노예가 아닌 귀족의 부인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타퀸 또한 막판까지 고민한 대목은 자신의 욕정과 이것이 현실화하였을 때 가져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결국 욕정이 이성과 공포를 압도하였으니 인간에게 있어 욕정은 개체적 존재의 근원인 본능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의 성립을 위한 통제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욕정에 굴복한 타퀸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오명의 길로 나아간다.

 

욕정은 나의 키잡이요, 아름다움은 나의 포획물이라. / 이런 보물이 바다에 있다면, 누가 빠지기를 겁내랴? (P.32)

 

나도 알거니와 이 행위 뒤에 후회의 눈물이 계속되는 것도, / 비방과 경멸, 그리고 무서운 증오가 뒤따르리라. / 그러나 나의 악명을 가슴속에 껴안고자 노력할 것이요. (P.48)

 

타퀸의 급습에 놀란 루크리스의 항변은 은근하지만 집요하다. 어지간한 침입자라면 제풀에 자책하고 사과하며 물러났을 것이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타퀸에게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타퀸은 비열하게도 루크리스의 명예 손상을 위협 도구로 사용한다. 자칫하면 부정한 여자로서 죽음을 맞게 되고, 명예를 잃은 채 남편과 세상의 오해를 되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녀로서는 빠져나갈 출구가 없었기에 그의 겁탈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은 강제로 여인을 취한 왕자의 허망함과, 정조를 잃고 허탈한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의 상반되는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하여 보여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자기가 저지른 죄로 자신을 증오하고. / 그녀는 절망으로 자신의 몸을 손톱으로 찢는다오. / 그는 죄의 두려움에 땀을 흘리며 맥없이 줄행랑이라. / 그녀는 남아서, 무섭던 그 밤을 한탄하며 소리지르고. (P.65)

 

절망에 빠진 그녀는 슬픔과 비탄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녀의 처참한 심경에는 만사가 모두 원망스럽다. 타퀸의 만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을 원망하며, 그의 능욕을 가능케 한 기회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다. 마찬가지로 능욕을 허용하도록 악용당한 시간에 대해서도 처절한 원성을 토로한다. 이처럼 비통한 루크리스는 주변의 모든 것에 시비를 걸면서 신화 속의 필로멜[필로멜라]과 자신을 같은 치욕을 당했다는 점에서 동일시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치욕을 감내한 이유가 분명하기에.

 

그러나 나는 죽지 않으리라, 불시에 죽는 이유를 / 콜라타인이 알게 되기까지는. / 나의 슬픈 임종시에, 이 목숨을 끊게 한 그자에게 /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남편이 하기까지는, (P.97)

 

남편과 아버지와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공개하고 복수를 약속받은 루크리스의 자결은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시인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남편 콜라타인과, 그녀의 피 묻은 칼을 들면서 복수를 외치는 브루터스를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남편은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런 주도적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난다.

 

시인은 루크리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써 귀족들이 합심하여 만행을 저지른 타퀸을 쫓아내도록 브루터스의 숨겼던 영웅성을 일시에 드러내고 있으니 여기서 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브루터스의 후손이 훗날 공화정을 지키고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그 브루터스[브루투스]라고 한다.

 

타퀸의 사악한 죄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하며, / 그 일이 바로 신속하게 실행되오니, / 로마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는지라, / 타퀸을 영원히 국외로 추방하기로. (P.145)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줄거리에서 설명하였던 역사적 의의를 슬며시 외면하고 오로지 루크리스를 위한 사적인 복수에만 국한한다. 왕자 타퀸이 중죄를 저질렀다면 그를 내쫓으면 되며, 나아가 타퀸의 아버지인 왕도 추방하면 그뿐이다. 다시 새 왕을 추대하여 정체(政體)를 이어가면 됨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아예 왕정을 폐지하는 기회로 삼아버렸다. 이 말은 타퀸의 루크리스에 대한 능욕은 단지 방아쇠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누적되었던 왕정의 폐해에 분노를 삼켜오던 귀족과 대중의 분노가 루크리스의 죽음을 계기로 화산처럼 분출하였기에 정체(政體)의 변경에까지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어디까지나 루크리스의 능욕을 개인적 복수로 해결할 뿐, 사회적 폭압으로까지 해석하지 않는 제한적 태도를 보여준다. 아마도 시인이 처한 당대의 정치 현실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였으리라.

 

이 작품에서 이채로운 부분이 있는데, 겁탈당한 루크리스가 날이 밝아오기를 불안하게 기다릴 때 트로이의 이야기를 담은 명화에 눈을 돌리는 대목이다. 그녀는 그동안 무심하게 넘겼던 그림 속 내용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설적인 고대 왕국의 멸망을 이끈 인물 헬렌과 패리스를 비판한다. 그들의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욕정은 타퀸의 그것과 근원적으로 동일하다. 더욱이 트로이인을 기만한 시논은 순진한 외양을 한 채 다가와서 순수한 천성의 상대방을 속였다는 사실에서 타퀸과 흡사하다. 그에게 향한 그녀의 극도의 분노와 적개심 분출은 시논이 아닌 타퀸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전쟁을 일으키게 한 창부 헬렌을 보여다오. / 내 손톱으로 그 고운 얼굴을 찢어줄 것이니. / 어리석은 패리스, 불타는 트로이가 짊어진 이 분노의 짐은 / 그대의 격한 욕정이 초래한 것이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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