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선화유사
천대진 옮김 / 학고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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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수호지>의 원형을 담고 있어 문학사적 의의가 있는 역사소설집이어서다. 확실히 <수호지>의 주요 인명이 이야기에 나오고 어렴풋하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딱 거기까지다. 이 책의 여러 이야기 중에 송강의 반란 이야기98쪽에서 107쪽으로 다른 산발적인 일화에 비하여 주요 이야기에 해당하지만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분량 면에서는 오히려 휘종과 이사사의 이야기115쪽에서 141쪽으로 훨씬 길고 흥미로운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중국 선화(宣和) 시절의 남겨진 이야기라는 뜻이다. 선화는 북송 휘종 시절에 쓰던 연호 중 하나다. 왜 하필 선화 연호를 언급하였을까. 휘종의 마지막 연호이어서다. 그는 중국사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 즉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을 포로로 잡아간 치욕적인 정강의 변의 주인공이다. 이로써 송나라는 멸망하고 살아남은 왕족이 양자강 이남으로 도주하여 재건한 나라가 바로 남송이다. 멀쩡히 잘 나가던 송나라가 졸지에 망국이 된 게 아니다. 미술사에서 명성 높은 황제이지만 위정자로서는 매우 형편없던 암군, 혼군이 휘종이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송나라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릇 선화 때의 환란은 희녕 때부터 선화 때까지 소인배가 60여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여 간사하게 아첨한 것이 오래토록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P.163)

 

이 책의 작자는 미상이지만 휘종을 향한 울분과 직설적 비난을 보면 그가 휘종 치세를 얼마나 암담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송강의 반란 이야기는 이런 혼란기의 한 자취일 뿐이다.

 

오늘 이야기할 것도 무도한 한 군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소인을 믿고 황음무도하였으며 조종(祖宗)의 혼란스러웠던 세상을 아예 망쳐서 부자가 북쪽 땅으로 가게 되었다. 조종이 나라의 기반을 세울 때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구나! (P.45)

 

전체적 구성은 연대에 따른 역사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심은 송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지만, 멀리 요순 시기부터 휘종 이전의 송나라 임금까지를 가볍게 훑고 있다. 여기서 작자가 주목한 것은 나라를 망친 임금들이다. 걸주와 당 태종, 그리고 신종 때의 왕안석이 등장한다. ‘왕안석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주요 이야기 중 하나에 해당한다. 전자의 임금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왕안석을 특히 다룬 것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이 불러일으킨 파장과 사회적 혼란에 작자가 매우 부정적 견해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왕안석이 휘종 때의 대표적 간신 채경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왕안석의 아들 왕방(王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하였다. 그는 종양이 나서 죽었는데 향년 33세였다. 왕안석은 애통하였으나 위로할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왕방이 몸에 쇠칼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왕방이 왕안석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나쁜 일을 하셔서 제가 이런 중벌을 받게 되었답니다.” (P.52)

 

작자는 휘종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멀쩡한 나라를 졸지에 패망시킨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왕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후대에 남겨 경계와 교훈으로 삼고자 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한다. 작중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휘종의 태도는 한마디로 정치에는 관심 없고 풍류와 여색에만 홀딱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능한 신하라도 잘 등용하여 믿고 맡기면 좋았겠지만 올곧은 신하는 배척하고 아첨에만 능한 간신에게 전권을 맡겼으니 앞날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작중에서 통치자 휘종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요 이야기 중 도교에 심취한 휘종 이야기휘종과 이사사의 이야기는 그가 군주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음을, ‘간신 채경과 휘종의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보여준다. 자신을 장생대제군의 강림이라는 아첨에 솔깃하여 스스로 도교 황제의 존호를 책봉하고, 오죽하면 양위하고 난 후의 존호마저 도군황제(道君皇帝)를 사용하였으니. 이 정도면 도교를 애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흠뻑 심취하여 제정신마저 잃은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간신 채경은 항상 휘종에게 권한다. 황제로서 골치 아픈 정사에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짧은 세월 그저 마음껏 즐기고 놀아야 한다고. 이런 말을 한다고 덥석 받아들이는 휘종은 백성의 고초가 어떠한지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송강과 방랍의 난이 발생하여도 전혀 걱정과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풍악을 울리며 자신의 환락과 쾌락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충신의 충언을 오히려 희롱으로 응대하는 군주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간신이 횡행하는 조정과 백성이 죽어 나자빠지고 원망과 고통의 원성이 천지에 자자한 세상을 만들고도 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임금이라니. 소인배가 권력을 장악하여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 둔 책임은 결국 군주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만세산을 짓게 하고 태호의 돌을 다시 운반해오게 하였으며, 소주와 항주로부터 변경에 이르는 여정에서 민가에서 장정이 1명 있으면 1명이 부역을 했고, 둘이 있으면 둘 다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두 강의 연안에는 죽은 장정들이 즐비했고 원망과 고통의 원성이 온 들판에 자자했다. 천자는 뜻밖에 이를 알지 못했다. (P.144-145)

 

휘종과 이사사의 관계는 일종의 러브 스토리로 회자될 수 있었을 소재다. 그가 군주가 아니라 귀족이나 평민이었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이사사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창기로서 미색이 뛰어나고 가무에 능하여 황제의 눈에 띄었다는 점 외에. 망국의 책임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가혹하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민간에서 제일의 기생으로 연인과 자유로운 사랑을 누리는 행복을 빼앗긴 셈이 아니겠는가.

 

휘종의 무능함의 극단은 난데없이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점이다. 금나라가 쳐들어오자 혼비백산한 그는 갑자기 선양을 하고 상황으로 물러난다. 중국 역사에서 멀쩡히 생존한 황제가 선양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금나라와의 전쟁 처리는 골치 아프니 아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셈이다. 평시도 아닌 전시에 아무 준비 없이 떠밀려 황제가 된 흠종이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아버지를 잘못 만난 운명을 탓할밖에.

 

좌우에 명하여 황제를 땅에 패대기치고 버드나무 채찍으로 열다섯 대 넘게 때렸다. 황제는 비 오듯 눈물을 흘렸고 한참 동안 고초를 당하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지군은) 감시원에게 당부를 하고 가버렸다. 날이 저물어서 문을 나설 때 황제의 몸에는 상처가 생겨서 고통스러웠고, 일어나서 걸을 수도 없었다. 태상황도 여름 더위 때문에 병이 생겨서 그야말로 난감했다. (P.214-215)

 

작품 후반부는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이 겪는 고초와 모멸의 이야기다. 일국의 황제로서 부러울 것 없이 향락을 누렸던 휘종이 오랑캐, 그것도 하급 관리들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는 대목에서 문득 그가 자신의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그토록 무도하고 방탕하였을 것인가 궁금하다. 각각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두 황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자의 의중은 나라를 망친 군주의 최후를 보여주고자 함이리라. 오죽하면 금나라 황제가 그에게 혼덕공(昏德公)이라는 작위를 내렸을까. 두 포로 황제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는 역사상의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하니, 분노와 적개심을 고양하려는 의도로 지어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작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강왕이 세력을 규합하여 남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여러 장수들의 분투로 금나라의 공격을 물리친 것은 희망의 전조다. 상실한 중원 회복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작자의 한탄은 그저 아쉬움의 토로라고 이해해줄 수 있다.

 

애초에 <수호지>의 원류라는 평가에 궁금하여 책을 읽게 되었지만, <수호지>와의 연관성 자체는 이 책에서 그다지 높지 않다. 이 한 가지에만 주목하여 이 책을 평가한다면 다소간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의 반란 이야기<수호지> 사이는 멀고도 깊다. 조그만 시냇물이 도도한 장강이 되기 위해 얼마만 한 창의와 노력이 더해졌겠는가. 오히려 북송의 패망과 남송의 재건, 그리고 정강의 변에 대한 구체적 원인과 경과 등을 소설의 형태로 새롭고 자세히 알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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