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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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All Is True (모든 게 진실이다)

 

<헨리 5> 이후 한동안 잉글랜드 역사극을 중단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역사극인 동시에 그의 희곡 중에서도 최만년작에 해당한다. 셰익스피어의 단독 창작이 아니라 존 플레처와의 합작으로 간주되는데, 존 플레처와의 합작은 처음이 아니라 <두 귀족 친척>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가 오랜 시간 역사극 집필을 중단한 까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재위 중인 시기인 까닭에 부왕인 헨리 8세를 다루기에는 부담이 컸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튜더 왕가가 단절되고 스튜어트 왕가가 들어선 이후에야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모를 작품의 소재로 그것도 조심스럽게 삼을 수 있었으리라. 이 작품의 원제를 보면 다른 역사극과 분명한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다. 왕 이름을 표제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은, 작가가 굉장히 신중을 기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표다.

 

장미전쟁을 종식한 헨리 7세의 아들인 헨리 8세는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의 절대왕정을 확립시킨 인물이며, 독자적으로 종교개혁을 시행한 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의 눈에는 별로 마뜩잖았던 모양이다. 작품 내내 헨리 8세의 통치력과 가정사를 비판적으로 재단한다. 헨리 8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세 인물이 왕의 변심 때문에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게 이 극 작품의 핵심적 내용이다.

 

11장에서 인정 많으신 버킹검, 온갖 예의 전범’(P.49) 버킹검 공작은 왕의 총신인 울시 추기경과의 알력으로 등장과 동시에 파멸을 맞이한다. 이 사건은 추기경의 권세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동시에 다른 귀족들이 더욱 단합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버킹검 공작을 비롯하여 노포크 공작, 궁내장관은 물론 신사, 평민들조차도 울시 추기경을 증오할 지경이다. 추기경과 귀족들 간의 갈등은 권력 투쟁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비천한 혈통인 주제에 고위성직자가 되었고, 왕의 총애를 얻어 모든 신하의 윗자리에 앉아 있으니 귀족들로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궁내장관) 하늘이 언젠가는 열어 주실 겁니다 / 폐하의 눈을, 이토록 오랫동안 자고 있었지만, 제대로 / 보여 주는 거죠 이 뻔뻔스런 악인을. (P.57, 22)

 

문제는 헨리 왕이 그를 너무나 총애하여 그의 단점과 여론의 평가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12장에서 가혹한 포고령의 강제 집행을 금지하는데, 정작 왕의 승인 없이 포고령을 임의로 작성하고 시행한 당사자가 누구이며 어찌 처벌할지는 전혀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울시 추기경은 다른 의미에서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막대한 축재와 왕비 이혼 추진은 헨리 왕을 위한 충성보다는 로마 교황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 실현의 도구임을 드러낸다. 앤 불린보다는 프랑스 왕의 여동생을 왕의 재혼 감으로 생각하는 것도 같은 동기에서다.

 

헨리 왕이 울시 추기경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된 것조차 자신의 의사를 충실히 좇아 이혼 사안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지 않는 게 기분 나빠서일 뿐이다. 결국 헨리 왕은 능력 있는 신하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과 마음에 영합하는 신하만을 가까이하는 인물이다.

 

(헨리 왕) (방백) 이제 보니 / 추기경들이 날 갖고 노는군. 싫다 / 로마의 이런 꾸물대는 지연 술책이. 학문과 인기가 높은 내 충복, 크랜머, / 네가 돌아와야겠다. 네가 다가오면 / 내 위안도 따라오느니. (P.80, 24)

 

훗날 가디너 주교가 왕비 이혼에 도움을 준 크랜머 대주교를 이단으로 탄핵하자 왕은 표면적으로 공정한 재판 절차를 진행하라고 하면서도 그에게 몰래 자신의 반지를 건네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직접 개입하여 가디너와 탄핵 지지 세력을 위협한다. 그리고 반강제적으로 화해와 통합을 요구한다.

 

(헨리 왕) 그대들 중 몇몇은, 내가 알지, / 성심은커녕 앙심을 갖고, / 재판을 통해 그를 극형에 처하고 싶어 하고, 수단만 있다면. / 하지만 그대들은 결코 수단을 갖지 못할 것, 내 생전에는. (P.155, 52)

 

어찌 보면 헨리 8세는 선호와 태도가 명확한 인물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아끼고 효용 가치가 낮아지면 주저 없이 버리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추진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형수와의 결혼 생활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마음에 거리낀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작가는 이전에 왕과 앤 불린의 만남, 한눈에 그녀의 미모에 반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왕의 위선적 태도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무려 24년간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고, 여러모로 흠잡을 데 없다고 스스로 인정한 왕비를 뒤늦게 쫓아낸 것이다. 24장의 헨리 왕 대사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라고 말한 크레타인을 연상시킨다.

 

(헨리 왕) 이 세상 어느 사내가 말하기를 / 제 아내가 더 낫다 하거든, 그의 말 하나도 믿지 마라, / 그 말 한마디 분명 거짓이니. 당신이 유일하오- (P.75, 24)

 

작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후인 앤 불린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왕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앤 불린에 노부인은 위선 떨지 말라고 하면서. 앤 불린에 대해서는 그래도 긍정적 대사가 훨씬 더 많다. 아무래도 그녀의 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압권은 제4막의 대관식 장면인데, 대관식 행렬 순서를 길게 나열하는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처음 보는 사례이다. 그만큼 헨리 왕과 앤 불린의 재혼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자는 이미 역사를 통해 앤 불린의 왕비 재위가 오래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녀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음도.

 

이 작품은 대조적 면에서 캐서린 왕비와 울시 추기경의 인물 됨됨이가 돋보인다. 왕비는 시종일관 고상하고 품위 있으며, 자신을 버리려는 왕을 향한 연민과 애정, 충성의 끈을 놓지 않는다. 독자에게 이런 뛰어난 왕비를 저버리려는 헨리 왕과 울시 추기경에 비난의 마음을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울시 추기경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은 자타가 인정할 정도였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과 왕의 신임을 잉글랜드가 아닌 개인적 야심 추구에 사용하였다. 자신의 행위가 절대적 충성의 차원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에게는 야심과 충성이 동의어로 인식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반전은 그가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한 이후다. 비로소 도덕적 각성을 하는 추기경에 대해서는 일말의 인간적 동정조차 갖게 된다. 비천한 혈통에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왔으니 그로서는 칼날 위를 달리는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조금의 방심과 곁눈질로도 파멸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 따라서 그리피스의 평가가 객관적이며 정당하리라.

 

(그리피스) 이 추기경, / 비록 비천한 혈통이나, 의심할 여지없이 / 숱한 명예를 안을 자질이 있었습니다. 요람에서부터 / 그는 학자였고, 그것도 무르익은 훌륭한 학자였지요, / 너무나 현명하고, 말 잘하고, 설득력 있었어요, / 거만하고 졸렬했지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한테는, / 하지만 친한 이들한테는 부드럽기 여름 같았어요. (P.126, 42)

 

옮긴이는 이 작품이 드라마라기보다는 일련의, 각 개인들이 겪는 재앙이나 사건들의 나열”(P.188)이라고 평한다. <프롤로그><에필로그>에서도 이 작품이 통상적 의미의 연극과는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웃음과 즐거움을 주려고 의도한 작품이 아니라며. 인간의 행복과 영광이 절정에서 얼마나 쉽사리 빠르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독자는 캐서린 왕비와 울시 추기경의 예를 통해 이것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작가는 최종 막에서 크랜머 대주교의 입을 통해 공주 아기씨 엘리자베스의 행복한 미래와 밝은 앞날을 예언한다. 헨리 왕은 공주의 세례식을 통해 가디너 주교와 크랜머 대주교가 포옹하고 화해하도록 하며 의도적으로 희망스럽고 즐거운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독자로서는 너무나 급작스럽고 마지못한 느낌이 강하다. 어둠과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에게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서 웃고 즐기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라면 가당키나 하겠는가. 오히려 강요된 평화와 화해는 자연스럽지 못하기에 임시변통이며 갈등은 잠시 재에 덮였을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언젠가는 표면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이 희곡이 주는 묘하며 일면 찝찝한 여운은 아마도 이러한 면에서 비롯하는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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