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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왕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4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셰익스피어가 존 왕을 주인공으로 영국 사극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다. 역사상 존 왕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사자심장왕 리처드 1세의 동생으로 왕위를 가로채고,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며, 로마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귀족들의 집단 반발을 초래하는 등. 작가는 이 희곡에서 오히려 존 왕을 긍정에 가까운 쪽으로 묘사한다. 유일하게 부정적인 장면은 조카 아서를 죽이라고 교사한 데 있다. 그리고 귀족들 앞에서 자신의 사주를 부인하고 수행원 휴버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한 태도를 보인다. 작가는 극중에서 아서는 자신의 실수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으로 처리한다.
정당한 왕위계승권이 아서에게 있다면, 할머니 일리노어 대비도 이를 인정했을 텐데 그녀는 아들 존 왕의 편을 든다. 며느리 콘스탄스와 시어머니 일리노어 대비 간의 살기등등한 2막 1장의 대화를 보면 콘스탄스가 단순히 자기 아들의 왕위를 계승 받지 못한 것에 분개한 것보다 더 깊은 내막이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그렇기에 일리노어 대비는 손자 아서보다 아들 존 왕을 선택한 것이리라.
‘실지왕(失地王)’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지닌 왕답지 않게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1차 전쟁에서 존 왕의 압도적 승리를 기록한다. 그리고 프랑스 왕세자의 입에서 존 왕을 영웅처럼 묘사하는 대사를 표현하게 한다.
(왕세자 루이) 그는 획득한 것을, 확고히 했어요. / 그토록 불같은 속도에, 그토록 절제된 판단력, / 그토록 격렬한 투쟁에 그토록 동요 없는 전열은, / 전례가 없는 거였어요. 누가 읽거나 본 적이 있겠어요, / 이와 유사한 전투 능력을? (P.78, 3막 4장)
이 작품의 또 다른 극중 중요한 갈등은 존 왕과 로마교황의 종교적 대립이다. 로마교황의 요구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여 이단과 파문이라는 당대로서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기꺼이 감내하는 존 왕의 태도는 오히려 순교자적 면모도 엿보인다. 게다가 그는 로마교황의 우월적 지위를 거부하고, 부패와 탐욕에 물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에게 베풀어줄 계획도 표방한다. 이렇게 당당하게 교회에 맞서는 그에게서 후대 영국 국교회를 창설한 헨리 8세를 기대할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것 또한 동일한 뜻이라고 믿고 싶다.
(존 왕) 비록 그대와 나머지 왕들이 모두 그토록 질질 끌려다니며 / 이 사기꾼 마법사를 아껴 국고를 지원하고 있으나 / 나만은, 나 하나만은 싸울 것이오. / 교황에 맞서, 그리고 그의 친구를 나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오. (P.62, 3막 1장)
(존 왕) (사생아에게) 사촌, 잉글랜드로 떠나게! 먼저 가라구, / 그리고 우리가 가기 전에, 반드시 털어야 해 / 수도원장들이 긁어모은 돈 가방을. 평화 시 살찐 갈빗대로 / 이제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거야. / 갇혀 있던 천사 금화들을 풀어 주라고. / 세리들을 총동원해서 말이야. (P.73, 3막 3장)
세속화하여 타락한 로마교회의 위세는 존 왕을 파문하고 그를 향한 반란과 살해를 부추기며 프랑스 왕에게 존 왕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강요하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추기경은 왕세자 루이의 야심을 알아차리고 아서의 죽음을 계기로 잉글랜드로 쳐들어갈 것을 대놓고 유도한다. 왕세자 루이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았던 것이나 오히려 자신이 들러리였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존 왕의 복종을 끌어낸 그의 말 한마디면 프랑스군이 곧바로 철군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왕세자 루이에게서 핀잔만 얻고 만다.
극중에서 루이는 자신의 야심을 거의 달성할 수 있었다, 멜륀의 폭로로 드러난 패착만 아니었다면. 토사구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권세가 확고함을 자신할 수 있을 때만 시도해야지 자칫하면 권좌 자체가 전복될 위험이 있다. 여기서의 왕세자 루이처럼.
이해관계에 따라 잉글랜드 왕에게서 프랑스 왕세자로, 다시 존 왕에게로 충성과 서약이 쉽사리 왔다 갔다 하는 귀족들의 태도가 우습다. 대의명분은 존 왕의 아서 살해에 대한 분개이지만, 왕권 앞에서 부자 관계도 험악해지기 일쑤인데-역사상 리처드 1세와 존 왕의 아버지 헨리 2세와 아들들의 대립을 보라- 삼촌과 조카는 더없이 멀고 가벼운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솔즈베리를 위시한 귀족들의 태도 표변은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해서일 뿐이다. 아서의 죽음 의혹은 여전히 존 왕에게 있고, 애초에 프랑스군을 오도록 만든 게 그네들이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진실한 인간상은 사생아 필립 팰컨브리지다. 리처드 1세의 사생아인 그는 극중에서 계속 사생아로 불리며, 거칠고 투박한 어투와 이해타산에 연연한 듯한 대사로 인해 일종의 악역 내지 부정적 인물이 아닐까 독자의 의심을 받는 인물이다. 모두가 삼촌 존 왕을 떠날 때도 그는 꿋꿋하게 곁을 지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무시무시한 용맹을 발휘한다. 의기소침한 존 왕에게 프랑스와의 비굴한 휴전을 거부하고 강력하게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존 왕의 죽음에 이르러 통곡하며, 딴마음을 먹지 않고 헨리 왕자에게 누구보다 앞서 충성을 맹세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일개 독자는 자신의 의심이 그릇되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실제 역사에서 별 볼 일 없는 일개 사생아를 극중에서 주인공 존 왕과 대등한 위치로 격상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플랜타저넷가의 정통성은 존 왕에게서 헨리 3세로 이어지지만, 이것이 가능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사생아의 공로다. 명분과 정의를 주창하지만 구린내 나는 행동을 일삼는 귀족과 사제에 비한다면, 고상하고 우아함은 없을망정 진실성이라는 면에서 사생아라고 멸시받는 필립이 더 참된 인간이다. 종막 종장의 마지막 대사, 그의 입을 통해 잉글랜드의 당당한 위엄과 밝은 미래를 선언하는 중대한 역할을 작가가 그에게 맡긴 것은 참으로 타당하다.
(사생아) 우리 잉글랜드는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 정복자의 오만한 발 아래 짓밟히지 않을 것이오 / 잉글랜드가 먼저 자해의 빌미를 갖지 않는 한. / 이제 이 나라 귀족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니, / 세계의 삼면이 무장을 하고 쳐들어와도, / 우리는 그것을 물리칠 것이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한탄케 못하리라 / 잉글랜드가 잉글랜드에게 진실되기만 하다면. (P.151, 5막 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