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셰익스피어 전집 4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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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극은 아직 완전하게 셰익스피어의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작품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세계 학계의 공인을 받게 된 게 199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단독 창작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공동 저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희곡의 국내 번역본은 신정옥과 신상웅 두 사람뿐이다. 이렇게 국내 번역본이 드문 까닭은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공인받은 게 매우 늦어서 1997년 이전의 저본은 이 작품을 수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셰익스피어의 작품과의 뚜렷한 유사성, 사용단어의 유사성”(P.161)이 있다고 인정된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백년전쟁을 일으킨 왕이고, 이 작품은 백년전쟁의 서막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일정 영토를 보유하고 있고, 결혼을 통한 왕실 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적통 왕계가 끊어지자 방계인 발로와 가의 죤을 왕으로 추대했는데, 에드워드 왕은 모친이 프랑스 왕가의 적통이므로 자신이 더 왕위계승권에서 앞서기에 왕위를 요구하면서 프랑스로 쳐들어간다.

 

(에드워드 왕) 그 놈이 찬탈한 왕관은 나의 것이라고 전하라. / 그리고 그 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굽혀야 한다고. / 내가 요구하는 것은 하찮은 공작령이 아니다, / 프랑스의 전 영토인지라. (P.19, 11)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연달아 읽다 보면 유사한 상황이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왕 vs 죤 왕의 대치는 헨리 5vs 샤를 왕과 닮은꼴이다. 여기서 아르또와는 <헨리 5>의 캔터베리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왕의 프랑스 공격을 선동하는 역할이다. 왕권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헨리 6>의 요크 공작 리처드 vs 헨리 6, <헨리 5>의 해리 왕 vs 쫓겨난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양자가 모두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권력을 가진 왕조차도 이 사실을 일정 부분 인정한다. 어디 왕뿐이랴, 귀족이나 시민조차도 그들의 주장이 꽤 타당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왕좌에 있는 왕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왕위를 선선히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정당성이란 면에서 약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죤 왕) 에드워드, 네가 프랑스에서 갖는 권리를 알고 있다. /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왕위를 포기할 바에야, / 이 전장이 피바다가 되고, / 우리는 도살장같이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P.90, 33)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이 벌어지면 평범한 백성 대다수가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만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다. 그네들은 왕권의 정통성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네 국가를 평화롭고 살기 좋게 잘 다스려줄 수 있는 지배자를 원할 뿐이다. 그럼에도 위정자들은 자기네들의 명분과 사욕에 몰입하여 그것이 지상과제인 줄 착각한다.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산과 생명을 몽땅 쏟아붓더라도 옳다고 여긴다.

 

(죤 왕) 한 왕국의 통치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건 / 얼마나 몸서리치는 공포인가, 너도 알 것이다. / 대지가 아찔하게 떨 정도로 흔들리거나, / 대기가 극열한 불빛을 쏟았다가, 작열하는 것도 / 왕들이 그들의 부풀어오른 / 마음의 원한을 나타내려고 할 때처럼 / 무서운 것도 없다. (P.77, 31)

 

이 작품은 그런 끔찍한 공포를 다루고 있다. 물론 작가의 출신답게 잉글랜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극중에서 에드워드 왕은 실수도 하지만 결국은 잉글랜드의 위엄과 명예를 전 유럽에 휘날리는 영웅적 제왕으로 묘사된다. 설즈베리 백작부인을 향한 그의 무모하고 폭력적 구애는 아슬아슬한 극단 앞에서 겨우 멈춘다. 세상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심이 왕으로서 절대적 권력과 결합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으리라. 욕정에 맹목적으로 된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걸림돌이 된다면 백작도, 자신의 왕비도 제거하면 그뿐이다. 이처럼 12장에서 2막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인륜 도덕마저 무시하고 폭군으로 급전직하로 전락하는 왕과,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성군의 자질을 회복하는 왕의 모습, 그리고 그를 향한 작가의 영웅적 고양감이다. 이후로는 더는 백작부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채롭다.

 

(에드워드 왕) 일어서요. 나의 잘못으로써 당신의 명예를 드높이고, / 장차 당신의 명성을 풍성하게 할 것이요. / 나는 이제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났소. / 워릭, 내 아들, 더비, 아르또와, 그리고 오들리, / 용감한 전사들, 모두 어디 있느냐? (P.67, 22)

 

에드워드 왕의 극단적 태도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에게서도 드러난다. 적군에 포위되어 금방이라도 목숨을 빼앗길 것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그는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며 누구라도 왕자를 돕지 말도록 명령한다. 신하들의 비난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사자 새끼를 키우고 싶어한다. 물론 에드워드 왕자는 부왕의 기대에 전적으로 부응한다. 그 유명한 흑태자 에드워드이므로. 뽀와따에에서 앞서 보다 더한 수적 열세와 포위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오히려 죽음 앞에서 초연하다. 물론 독자는 왕자가 결국 승전을 거둘 것임을 미리 알고 있다. 샤를르 왕자가 언급한 예언은 잉글랜드의 승리를 암시하며, 실제로 프랑스의 패배로 확인되지 않았는가.

 

(에드워드 왕자) 나는 생명을 한 푼만큼도 치지 않을 것이다. / 아니, 엄격한 죽음을 피할 생각은 반에 반 푼만큼도 하지 않는다. / 산다는 것은 죽음을 찾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노라. / 그리고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일 뿐이니까. / 시간을 지배하는 신이 하시는 마음에 따라갈 것이며, / 살거나 죽거나 다른 것이 없느니라. (P.127-128, 44)

 

이 작품은 전쟁 중임에도 기사도의 정신이 살아 있는 장면을 곳곳에 집어넣고 있어 하나의 흥미로운 볼거리로 삼는다. 설즈베리 백작의 포로가 된 빌리에가 샤를르 왕자의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포로가 되기를 선택하는 대목, 포위된 에드워드 왕자에게 프랑스의 왕자들이 빠른 말과 기도서를 보내주는 대목, 왕자가 발행한 통행증을 지닌 설즈베리 백작 일행을 참수하려는 부왕에게 샤를르 왕자가 왕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대목들이 그러하다.

 

이 희곡은 잉글랜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에드워드 왕자의 기도는 전승 감사 기도이며, 에드워드 왕의 평화 선언은 잉글랜드의 전승가라 할 만하다. 잉글랜드는 최대의 적인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 승전을 거두고 두 왕국의 국왕을 포로로 잡았으니. 하지만 왕은 알았을까? 그가 시발한 전쟁이 향후 백 년 넘게 이어져 잉글랜드의 미래를 파란만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줄을.

 

작품 자체가 원래 그러한지 아니면 번역자의 차이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꽤나 매끄럽게 읽힌다. 대사 자체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다만, 크래씨 전투 후에 에드워드 왕과 왕자의 대화는 해석하기 모호할뿐더러 필연성도 의문시된다.

 

(에드워드 왕) 도망가는 사냥감을 조심해서 추격하여라.- / 이건 무슨 그림이지?

(에드워드 왕자) (그림을 가리키며) 페리칸입니다. 폐하. / 구부러진 부리로 자기의 가슴에 상처 내며, / 가슴에 흐르는 핏방울로 / 둥우리에 있는 새끼 새를 키웁니다. / 제명은 시크 에 보스- ‘너도 그럴 지어다입니다. (P.103-10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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