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5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8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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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2>의 말미에서 암시되었듯이 이 작품의 내용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 즉 백년전쟁을 다루고 있다. 물론 백년전쟁의 서막은 훨씬 이전에 열렸지만, 헨리 5세 때 맹렬한 기세로 점화되었다. 헨리 5세의 정복욕을 부추긴 인물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그는 분할상속법을 언급하며 프랑스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은 현재의 프랑스 왕이 아니라 마땅히 헨리 5세에 있음을 강변하며, 프랑스로 출병할 것을 선동하고 설득한다. 11장의 서두를 보면 알겠지만 대주교의 순수한 충정만이 아님은 독자도 알고 있으리라.

 

(캔터베리) 폐하의 것을 위해 나서서 펼치세요, 폐하의 피투성이 깃발을, / 돌아보십시오 폐하의 강력한 조상님들을. (P.21, 12)

 

(해리 왕) 프랑스는 짐의 것이니 짐에게 복종시키거나 / 산산조각을 내려 하오. 짐이 그곳에 앉아, / 크고도 풍만한 왕권으로 / 프랑스 및 그녀의 모든 왕국 수준 공작령을 지배하거나 /이 뼈를 보잘것없는 단지에 묻거나 둘 중 하나요, (P.27, 12)

 

캔터베리의 유혹에 넘어간 헨리 5세는 마침내 프랑스 정벌을 결행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넘나드는 전쟁의 전개와 시간의 경과, 그리고 수많은 인물을 제한된 무대에 올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제2막부터 각 막의 첫 장을 0장으로 하여 코러스를 등장시킨다. 코러스의 역할은 시간과 공간을 축약시켜 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보충 설명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의 다른 희곡과 구별되는 이 작품의 특징이다.

 

(코러스) 이렇게 상상의 날개를 달고 우리의 장면은 날아갑니다 / 동작의 민첩함이 / 생각의 그것 못지않게. 여러분은 보았다고 가정하세요. (P.60, 30)

 

<헨리 4> 2부작의 지배자인 존 폴스타프 경을 외면할 수 없다. <헨리 42>의 에필로그에서 폴스타프의 등장을 예고하였음에도 셰익스피어는 여기에 그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의 전언을 통해 그가 중병에 걸렸음을, 그리고 끝내 죽었음을 2막에서 알릴 뿐이다. 무대를 휩쓸었던 사실상의 주인공치고는 매우 초라하고 쓸쓸한 결말이다.

 

이 희곡에서 폴스타프를 대신하여 악역 또는 해학을 담당하는 인물은 피스톨과 플루얼런이다. 전쟁에 참여한 존 경의 친구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유일하게 피스톨만 살아남는다. 극중에서 피스톨은 퀴클리와 결혼하였는데, 전작에서 퀴클리가 자신과의 결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폴스타프를 비난한 사실과, 피스톨과 결혼하기 전에 님과 약혼한 사이였다고 하는 걸 보면 돌 티어시트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퀴클리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피스톨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악역이다. 바돌프와 님처럼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지만 플루얼런을 욕하고 대들다 비참하게 두들겨 맞는다. 잉글랜드의 승전으로 평화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에 그는 자신의 거취와 장래를 고민한다. 어느 쪽이든 피스톨답다고 할 만하다.

 

웨일즈인 지휘관 플루얼런은 매우 우직하고 용감하며 참다운 군인이다. 그런 그가 극중에서 해학적 역할을 맡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어수룩하게 들리는 웨일즈 말투 때문이다. 그와 피스톨, 그와 윌리엄즈 간의 장면은 해리 왕도 합세하여 우스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전쟁을 다룬 작품이니만치 살인과 파괴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관객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자 하는 배려라고 하겠다. 한편 36장에서 플루얼런과 피스톨의 대화는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데 이것이 원문이 그러한지 옮긴이의 선택인지 궁금하다.

 

프랑스 측에서도 묘한 여운을 주는 장면이 37장에 나온다. 부르봉 공작을 두고 오를레앙 공작과 최고관이 평하는 대화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오를레앙은 부르봉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소와 야유를 은근슬쩍 보여준다.

 

작가는 헨리 5세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당한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적국의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의 명령, 배신자를 제 꾀에 빠지게 하고 과감히 처단하는 결단력, 지치고 부족한 병력으로 결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한편 왕이라는 자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탄식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적 면모. 그리고 전장에서 병사와 장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단호한 웅변과 과감한 용기.

 

이런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승전을 낙관한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하는 법, 52장에서 카트린느 공주를 향한 그의 어설픈 구애 장면은 인간적인 동시에 영웅의 허점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동시에 안겨준다.

 

프랑스 왕의 처지에서도 한판 붙어보지 않고 선선히 자신의 왕관과 영토를 내줄 수는 없는 법. 어쨌거나 무수한 목숨의 대가로 평화는 성립하고, 양국은 결혼을 매개로 한 우호 친선의 관계로 접어든다. 사랑의 결합으로 양국의 영구한 평화를 샤를 왕, 이사벨 여왕, 해리 왕 이렇게 모두가 한결같이 희망하고 피력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실제 역사는 그것이 가능한 바람이 아님을, 권력욕은 인륜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해리 왕) 오 오늘은 제발, 생각지 말아 주소서 제 아비가 / 왕관을 빼앗으면서 저질렀던 잘못을. / 제가 리처드의 시신을 새로 묻었고, / 그 위에 흘린 뉘우침의 눈물은 더 많습니다. / [......] / 지금도 리처드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올립니다. 그 이상을 하지요, (P.110-111, 41)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승리를 절실히 간구하는 해리 왕의 입에서 뜻밖의 대사가 튀어나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버지 헨리 4세가 저지른 잘못, 그리고 자신의 뉘우침의 눈물이라니. 연대순으로 전후에 위치한 <리처드 2><헨리 6>를 연결하는 복선의 구실이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작가 또한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헨리 6, 강보에 쌓인 아기로 왕위에 오른 /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이 왕을 이었으나, / 국정을 좌지우지하려는 자 너무 많더니 / 그들이 프랑스를 잃고 그의 잉글랜드를 피 흘리게 한 것은, / 우리의 무대가 종종 보여 드린 대로이니-그것들로 하여, / 이 작품을 여러분께서는 좋게 보아 주시기를.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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