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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4세 1부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애초 계획에 따르면 <리처드 2세>와 <존 왕>을 읽어야 하는데, 전자는 도서관에 마침 책이 없어서 빌릴 수 없었고, 후자는 시대와 맥락에서 후속작과 동떨어져 있기에 <헨리 4세> 2부작을 먼저 읽기로 한다.
이 작품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반대파와 치른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표제는 분명 <헨리 4세>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헨리 4세가 아니다. 헨리 4세의 왕세자 해리가 공식적 주인공이며, 그와 대척 관계에 놓인 핫스퍼가 안티 인물로 나온다. 무엇보다 이 희곡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일무이할 정도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의 형상이다.
폴스타프라는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오로지 <헨리 4세> 2부작과 같은 시기에 쓴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만 등장한다. ‘경’이라는 호칭이 붙으므로 분명 귀족 계급이라고 해야겠지만, 전혀 귀족답지 않게 배불뚝이 뚱뚱이에 애주가며, 상스럽고 탐욕이 많으며 비겁한 가운데 거짓말도 능수능란할뿐더러 강도질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법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도 떨어진다.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해리 왕세자) 폴스타프가 죽도록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 걸어가면서 야윈 대지에 기름을 뚝뚝 떨어트려 주는군. /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그렇지, 불쌍하기도 하이. (P.51, 2막 3장)
(폴스타프) 아다시피 아담은 순결한 세상에서 타락했어, 그런데 불쌍한 보통 남자 폴스타프더러 악행의 시대에 어쩌라는 게야? 자네 보다시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살이 더 많아, 그러니 더 유혹에 약하단 말이지. (P.113-114, 3막 3장)
희극적인 점을 제외한다면 사회악에 가까운 인물이겠지만, 작가가 이 인물에 쏟는 정성과 애정은 각별하다. <헨리 4세>는 기실 국왕군과 반란군의 한바탕 격돌이라는 주된 사건보다도 왕세자 해리와 폴스타프, 그리고 포인즈, 바돌프, 개즈힐 등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당탕이 더욱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폴스타프 같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의 왕궁 광대와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작품 자체의 진지함에 가벼운 파문과 일탈을 줌으로써 긴장을 풀고 해방감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또한 극중 인물들이 드러내기 어려운 권력자를 향한 직언과 희롱 등을 마음껏 배출함으로써 관객에 일종의 쾌감도 선사한다. 광대의 농담 속에 일말의 진실과 예언이 포함되었음도 물론이다. 폴스타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처신하며 심지어 자신과 어울리는 왕세자에 대해서도 마구 험담을 늘어놓는다. 제5막에서 폴스타프는 해리 왕세자가 죽인 핫스퍼를 마치 자신이 죽인 양 거짓과 조작을 하지만, 해리 왕세자는 오히려 그에게 너그럽게 대한다. 그런 폴스타프가 불쑥 내뱉는 진실을 담은 대사는, 비록 계기가 불순하지만 깊은 함의를 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폴스타프) 명예가 뭐지? 하나의 단어. 그 ‘명예’라는 단어에 뭐가 들었지? 누가 명예를 지니고 있지? 수요일날 죽은 자. 그가 명예를 느끼나? 아냐. 그가 명예를 듣냐? 아냐. 그렇다면 명예는 감지가 안 되는 건가? 그래, 죽은 자한테는. 하지만 명예가 산 자와 함께 살 수 있잖은가? 아니지. 왜냐고? 중상모략이 그걸 용납할 리 없거든. 그러므로 난 명예 따위 안 하겠어. 명예란 문장 새긴 장례식 방패에 불과해. 그리고 나의 교리문답은 거기서 끝. (P.146, 5막 1장)
철저히 현세적이고 쾌락 지상주의인 폴스타프와 해리 왕세자의 작당은 태생에서 이미 시한부임을 예감케 한다. 해리 왕세자의 방종과 일탈은 그의 본성적 요인보다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계획적 행위에 가깝다. 헨리 왕은 왕세자 해리에 실망하며 그가 명성 높은 핫스퍼와 차라리 바뀌었음을 바랄 정도이지만, 관객은 왕세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린다.
(해리 왕세자) 침침한 배경의 찬란한 금속처럼, / 나의 개과천선은, 내 잘못을 배경으로, / 보다 더 훌륭해 보이고 더 많은 시선을 끌 것이다 / 돋보이게 하는 그 무엇이 없을 경우보다. (P.22, 1막 2장)
제3막에서 해리 왕세자는 부왕 앞에서 왕세자다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맹세한다. 무용으로 명성 높은 핫스퍼를 자신이 대적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그가 단지 방탕할 나날을 보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5막에서 해리는 핫스퍼와 맞닥뜨리며 결투를 벌여 자신의 약속을 이행한다.
앞서 읽은 <헨리 6세> 삼부작과 <리처드 3세>에서 만개했던 장미전쟁의 씨앗이 이 작품에서 배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왕세자의 부왕인 헨리 왕, 즉 헨리 4세가 리처드 3세를 추방하고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랭커스터가가 왕권을 잡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된 모티머는 졸지에 반란세력이 되었고, 왕에 대한 우스터, 핫스퍼, 노섬벌랜드 백작 등의 반대파가 헨리 왕을 증오함을 극중에서 찾을 수 있다. 훗날 요크 공작이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헨리 6세에게 반항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핫스퍼) 리처드, 그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장미를 꺾고 / 이 가시 관목, 이 자벌레 해충 같은 볼링브루크를 심었다는 얘기로? (P.31, 1막 3장)
이 작품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승전이 사태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 게, 아직도 막강한 반대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들을 처리해야 비로소 왕권이 단단히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왕의 일장 연설은 이를 나타낸다. 여기서 잠깐,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핫스퍼,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당한 우스터 등은 어떤 인물인가. 그들은 헨리 왕이 리처드 2세를 내쫓고 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일등공신이다. 반대파가 처음부터 헨리 왕에게 저항의 기치를 들어 올린 게 아니다.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려는 헨리 왕,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귀족층. 일시적으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합치할 수 없는 두 세력의 대결, 그것은 세계사를 통틀어 항상 반복되는 현상이다.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될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