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헨리 6세 1부 ㅣ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독서를 시작하면서 출발점을 어디로 삼을지 고민하였다. 집필 순으로 보자면 <헨리 6세> 삼부작이 앞서고, 왕위 연대순으로 따지면 <존 왕>이 첫 번째 순서가 마땅하다. 후자는 시대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개를 따라갈 수 있고 앞선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전자는 셰익스피어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발전되는 모습을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작가가 시대순에 연연하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게 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할 기대를 품을 수 있다. 나의 최종 선택은 집필 순이다.
영국 역사를 극작의 소재로 삼았으니 아무래도 역사 지식이 있으면 전체적 맥락 이해에 유리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랭커스터가와 요크가의 장미전쟁을 거쳐 튜더 왕조가 성립하는 영국 중세와 근대 초기의 흐름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작가가 강조하거나 생략한 장면, 변용을 가한 대목을 비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삼국지연의> 감상을 위해 <정사 삼국지> 선행 독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것은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 시대를 삼부작으로 나누어 집필하였다. 영국사의 분수령이 되는 이 시기를 좀 더 상세하고 치밀하게 파헤쳐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게 한다. 백년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어린 헨리 6세를 둘러싼 귀족들의 권력 암투가 점차 두드러지는 모습을 1부에서 볼 수 있다. 귀족들에게 중요한 건 왕권도 백성들의 고통도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 도모와 권력 확장에 있다. 호국경 글로스터가 통박하듯이 말이다.
(글로스터) 당신들은 그저 나약한 군주만 좋아하지. / 그래야 학동처럼, 당신네들이 겁을 줄 수 있을 테니. (P.11, 1막 1장)
왕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은 어린 헨리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그의 존재와 행동은 의심과 질시의 대상이다. 호국경인 그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귀족들은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 게다가 왕위계승권 1위인 그의 지위는 그가 행하는 모든 언행을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해석하도록 만든다. 독자는 아직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확실한 것은 어린 헨리 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사실이다.
귀족들의 불화는 두 갈래로 구분된다. 글로스터와 윈체스터는 친척 간이다. 극 중에서 헨리 왕은 두 사람을 모두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양자는 또한 숙질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촌수로는 윈체스터가 앞서는 건 분명하지만, 직계가 아닌 방계인 듯싶다. 그래서 글로스터가 그를 무시하는 언사를 보이는 게 아닐까. 하여튼 윈체스터는 사제로서 나중에 추기경으로 오르지만 강력한 권력욕을 드러내어 다른 귀족들에게도 평판은 썩 좋지 않다.
서머싯과 리처드, 나중의 요크 공작 간 불화는 사소한 언쟁에서 비롯한다. 각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가운데 붉은 장미와 흰 장미로써 무리를 표시하는 장면은 영국사를 아는 독자라면 훗날 장미전쟁의 발단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헨리 왕도 말했듯이 어처구니없지만, 이것이 어디 근본적인 원인이겠는가, 방아쇠에 불과할 뿐.
(헨리 왕) 착하신 경,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 어떻게 그리도 사소하고 하찮은 이유로 / 이런 파당적 시샘이 생겨날 수 있단 말이오? (P.111, 4막 1장)
그럼에도 사소하고 하찮은 다툼은 거대한 불화와 분쟁으로 점화되는데, 엑스터 공작이 이를 3막 1장과 4막 1장에서 반복적으로 예언한다. 그는 극 중에서 독특한 인물이다. 어느 파당에도 속하지 않고 헨리 왕의 곁을 지키는 엑스터는 귀족들의 다툼이 비극을 가져올 것임을 초연하게 언명하는 예언자적 인물이다.
(엑스터) 하지만 소용없지,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두 눈으로 / 이 삐걱대는 귀족들의 불화를,/ 궁정에서 서로를 어깨로 밀쳐 대는 꼴을, / 추종자들이 일삼는 이 파당 싸움질을 본다면, / 그것이 정말 불행한 결과의 전조임을 알리라. / 왕홀이 어린이 손에 들려 있는 것도 문제지만, / 시샘이 기괴한 분열을 낳는 것이 더 큰 문제로다. / 거기서 멸망이 오고, 거기서 혼란이 시작되나니. (P.114, 4막 1장)
귀족들 간의 불화가 본격적인 갈등으로 점화되는 계기는 백년전쟁과 연관되어 있다. 시선을 잠시 프랑스로 돌리자. 초기에 유리했던 영국의 전황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다. 군사와 물자를 바다로 실어날라야 했던 영국 입장에서는 군주와 귀족이 단합해야 공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음에도 제1막 초반부에서 사자들의 전언에서도 보았듯이 귀족들의 내분으로 수세적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전쟁 영웅 탈봇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본토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그는 프랑스에서 영국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순전한 애국심의 상징이다. 그의 막강한 무력은 프랑스군을 두렵게 만들고 오직 잔다르크만이 그의 적수가 될 뿐이다. 하지만 제5막에서 볼 수 있듯 탈봇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이라면 잔다르크는 악령의 도움을 받았으니 실질적 비교는 어렵다.
(잔) 내 몸으로도 피의 희생으로도 / 간청할 수 없단 말이냐 너희가 늘상 주던 도움을? / 그렇다면 내 영혼을 주마-내 몸, 영혼, 그리고 모든 것을- /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패배를 안기기 전에. (P.143, 5막 3장)
이 작품에서 탈봇과 잔다르크 모두 목숨을 잃지만 양자의 최후는 전혀 다르다. 탈봇은 고결한 전쟁 영웅으로서 장엄한 최후를 마치지만, 성처녀는 마녀로서 고결에서 추악으로 전락한 채 경멸로 목숨을 잃는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잔다르크를 향한 편견과 비난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만큼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의 등장은 영국에게 있어 치명타였으므로, 성처녀가 아닌 마녀라고 믿고 싶었으리라. 탈봇, 요크공작의 그녀에 대한 비난적 언사, 자신의 양치기 아버지를 부인하는 잔의 대사, 그리고 애를 가졌다고 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잔의 행동을 보면 그녀에 대한 영국인의 악의적 감정을 알게 한다. 따라서 이점을 가지고 셰익스피어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탈봇) 더러운 프랑스의 적, 그리고 참으로 경멸스러운 마녀야, / 네 음탕한 정부들한테 둘러싸여, / 가당키나 하더냐 네가 그의 용감한 나이를 조롱하고 / 반쯤 죽은 이를 비겁하게 야유하는 것이? (P.91, 3막 5장)
(잔) 형편없는 늙은이, 비천하고 저열한 놈 같으니, / 난 더 귀족적인 혈통 출신이야, / 네놈은 내 아비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란 말이다. (P.154, 5막 6장)
(잔) 나는 애를 가졌다, 너희 피비린 살인자들아, / 그러니 살해하지 마라 내 자궁 속 열매를, / 설령 너희가 나를 난폭한 죽음에게로 질질 끌고 갈망정.
(요크 공작 리처드) 저런 하나님 맙소사-성처녀가 아이를 배? (P.157, 5막 6장)
제1부에서는 아직 발아되지 않았지만, 향후 분쟁의 씨앗이 심어지는 대목을 볼 수 있으니 제2부와 제3부의 복선에 해당한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모티머가 조카 리처드에게 모티머 가문이 몰락하게 된 숨겨진 역사를 설명해주는 2막 5장이 하나다. 리처드는 비로소 자신이 헨리 왕보다 왕위계승권에서 더 정통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반드시 이를 회복하리라 다짐한다. 모티머는 조카에게 신중을 기할 것을 재삼 당부한다.
(모티머) 조용, 조카, 신중해야지. / 랭커스터 가문은 확고히 섰고, / 산처럼, 제거할 수가 없어. (P.73, 2막 5장)
프랑스의 우세 속에 전쟁이 하염없이 길어지자 양국은 화친을 시도한다. 프랑스 왕을 영국 왕의 총독으로 삼는 조약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데, 영국의 패전을 완곡하게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서포크는 마가릿을 헨리 왕의 왕비로 삼고자 하는 모종의 책략을 꾸미고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헨리 왕을 미혹시켜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그의 의도는 제1부의 마지막 대사에서 확연히 나타나는데 이후 작품의 복선을 깐 셈이다.
(서포크) 마가릿은 이제 왕비가 되어 지배하겠지 왕을 / 그러나 나는 지배하리라 그녀, 왕, 그리고 왕국 모두를. (P.166, 5막 7장)
이 제1부는 삼부작의 서막에 해당한다. 대체로 등장인물 소개와 그들 간의 내재한 갈등,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오래된 역사적 불씨를 보여준다. 또한 백년전쟁의 최종 결과를 탈봇과 잔다르크의 두 영웅적 인물의 대결로 압축함으로써 패배한 영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을 볼 수 있다. 헨리 왕의 결혼이 가져올 새로운 국면과 장미전쟁으로 이어질 귀족 간의 본격적 대립은 아직 물밑에 놓여있다. 이는 제2부와 제3부에서 구체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