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 습유기
김영지 지음 / 한국출판협동조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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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괴소설집의 하나다. 저자는 도교의 방사(方士)인 왕가라고 하는데, 훗날 소기가 잔존한 판본을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하였다. 소기는 단순히 편집에 그치지 않고 주요 고사 또는 각 권의 마지막에 록()이라고 하여 자신의 비평을 추가하고 있다. 사실상 저자가 두 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도가와 유가의 분위기가 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앞서 읽은 몇 권의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이 책은 서술 체계가 독특하다. 언뜻 보면 역사서에 가깝다. 10권 중 1권에서 9권까지는 복희, 신농, 황제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 당대까지의 고사를 담고 있다. 이처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주로 임금과 관련된 고사를 기록하고 있어서 정사를 보완하는 비사(祕史)로서의 성격을 포함한다. 표제조차도 빠뜨린 이야기를 주워서 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이런 연유로 과거에는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10권은 고대와 당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8대 명산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사와 지괴, 박물지가 혼재된 특이한 지괴소설류로 간주할 수 있다.

 

저자의 서술과 관련한 특색을 추가로 언급하자면 시대순으로 기술하지만 인물과 고사의 선별 기준은 도가에 가깝다는 점이다. 주나라의 목왕,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희공과 연나라 소왕을 다룬 것은 이들이 신선도에 빠져있던 걸로 정평이 난 군주들이어서다. 8대 명산도 소위 오악(五嶽)과는 무관하게 도가에서 중시하는 산들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삼신산이다. 곤륜산은 서왕모가 산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거리에는 붉은 풀들이 가득하고 무성한 수풀 위로는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하늘에 제사모시는 흙 단을 쌓아서 아침 해에게 제사를 드리고, 옥섬돌을 꾸며서 달빛을 담아낸다. 구천의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노라니 온갖 동물들이 춤을 추었고 여덟 가지 음색도 잘 어우러지니 나무와 돌에도 윤기가 흘렀다. (P.32, 염제 신농)

 

위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록된 고사의 서술 내용 자체가 비교적 세밀하고 때로는 장식적, 낭만적 묘사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집의 간략하고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둔 서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만큼 저자의 집필 의도와 필력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소설로서 한층 진일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쓰인 때가 서진 시기였으므로 삼국시대와 당대의 고사를 다룰 때면 은연중 자국의 정통성을 표출하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성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견강부회라는 생각을 숨길 수 없다.

 

예컨대 위에서 진으로 넘어가던 무렵 궁궐 문에 작은 참새만한 하얀 빛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덕(金德)의 길조라고 해석하여 진의 성립을 천명으로 풀이하는 대목(P.233)이 그러하다. 옮긴이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위는 불에 속하며, 진은 금()에 속한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위, , 오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도 엿볼 수 있다. 유비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거부 미축의 사망 원인을 촉이 망하는 바람에 잃어버린 재물이 아까워 한이 되어 죽었다(P.268)고 하는데, 미축은 촉이 멸망하기 이전에 죽었으며 동생 미방이 촉을 배신하여 화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옮긴이가 의미읽기에서 바로잡고 있다. 악의적 왜곡의 전형이다.

 

이국원인(異國遠人)에 관한 관심은 <산해경>, <신이경> 등에서처럼 여전하다. 지리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한 시절 호기심과 상상력이 결부된 각종 먼 나라 기이한 물산의 이야기는 한낱 터무니없는 걸로 치부하기에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너무나 멀어서 조공을 오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려 어린 사람이 노인이 된다는 연구국(P.87), 선녀가 변신한 무희를 바쳤다는 광연국(P.137), 자유자재로 도술을 부리는 목서국=신독국(P.141), 수명이 삼백 세인 기륜국(P.174) 등은 당대인들의 호기심 충족에 그만이었으리라. 어쩌면 지리적 발달에 다소는 공헌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선에 관한 고사가 많은 경우를 점하는데, 넓게 보면 삼황오제가 모두 신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왕모를 만났다는 주나라 목왕의 서방 여행, 그리고 서왕모에게서 단약 재료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만 연나라 소왕 고사(P.141)는 서왕모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 정도를 보여준다. 신화적 인물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도 신비화하는데 괴력난신과 무관한 공자의 탄생 장면도 신비롭게 미화하고 있어 과연 공자가 이를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으려나 궁금하다.

 

주 영왕 21, 공자는 노나라 양공 통치 시절에 태어났다. 그날밤 푸른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머니 징재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꿈을 꾸고 공자를 낳았다. 두 명의 신녀가 하늘에서 향기로운 이슬을 받들고 내려와 어머니를 목욕시켜 주었다. 천제가 내려와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여 징재인 안씨 방에 베풀어놓았다. (P.107)

 

도가에서 숭상하는 노자 또한 그만둘 리가 없다. <도덕경> 저술과 관련한 신화화 사례(P.121)를 보자. 부제국에서 선서에 신통한 두 사람이 노자를 도와 저술 작업에 참여하여 골수와 피로 먹물과 등불 기름을 대신하였고, 경전이 완성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도덕경>이 최초에는 1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고 하며, 노자가 간소하게 정리해서 5천 자로 줄였다고 하는 점도 기억하자. 서방으로 떠나면서 관윤 윤희의 부탁으로 글을 남겼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신화와 전설 속의 제왕과 군주, 성인이 수록한 고사들의 주된 인물임에 반해 가까운 시기의 문인으로는 한나라 유향(P.210)이 유일하다. 이는 지괴소설의 선배에게 바치는 후배의 찬사다. 마찬가지로 소위 중원인을 제외하면 오랑캐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석호다. 그는 516국 중 후조(後趙)의 황제인데, 짐작하겠지만 폭정과 사치를 일삼은 안 좋은 본보기로 취급된다.

 

소기가 유학자이다 보니 원전의 내용에 본인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은 고사가 많이 있게 마련이다. 편집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인다. 우선 지나치게 황당무계한 내용의 고사들에 대해서는 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득히 멀리서 아련히 흘러온 글들은 백가(百家)가 현실과 유리되어 각자 그 기억함을 숭상했을 뿐, 뜻이 깊이 배인 도리는 아니다. (P.63)

 

중원과 외지는 기운부터 달라 이상한 기운이 각기 생겨나 구름과 강물, 초목도 괴이하고 아름다운 여러 형태를 취하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 유형이 동일하다. 지역이 멀고 변형이 심해서가 아니라 허망하고 괴탄함에 웃을 것이다. 널리 두루 살려 신령하고 기이함이 증험되길 바란다. (P.321)

 

그리고 유가적 가치에 부합하는 고사를 선별하거나 내용을 다듬는다. 주나라 영왕 때 위나라 영공의 악사였던 사연(師涓)이 작곡한 사계를 묘사한 음악에 군주가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을 지경이 되니 신하가 그 음악이 유해하다고 끊기를 간언하고 임금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고사(P.124)를 보면 유가가 지향하는 참된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악사는 부끄러움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은나라 폭군 주의 악사였던 사연(師延)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였던 고사(P.79)를 함께 비교하면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한문 고전 번역본과 비교할 때 산뜻하고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데 차별되는 점은 체재에 있다. 번역문과 원문, 주석, 그리고 해설로 이루어지는 게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번역문, 원문 그리고 의미읽기라고 하여 해설과 옮긴이의 감상 및 의견을 한군데 묶어놓았다. 주석은 매우 적어서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고리타분한 고전이 아닌 현대의 젊은 독자층에 다가서기 위한 캐주얼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표제도 원제 앞에 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라고 수식구를 넣었듯이. 보다 현실적인 사유인데, 적당한 분량의 한 권으로 편집하기 위한 목적일 텐데 상세한 주석을 넣으면 분량이 대폭 늘어나 두꺼운 학술서적이 될 우려가 있어서이리라.

 

다른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별로 중첩되는 내용이 없다는 점, 체재와 서술방식이 역사서와 유사하여 신선하며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기술과 묘사가 세밀하고 낭만적이어서 이야기 자체로서 상대적으로 완결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편집자의 날카롭고 비판적 평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이채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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