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기 소설선 - 한국문학과 관련있는
김종군 지음 / 박이정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앞서 중국 전기소설 모음집을 읽었는데, 번역과정에서 편집과 윤색이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다 원형에 가까운 번역집을 찾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전기소설 20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먼저 읽은 책과 중복되는 작품도 있는 반면 새로 실린 작품도 적지 않아 충분히 보완되는 장점도 있다. 이 책의 출간 의도는 표제(‘한국문학과 관련있는’) 및 옮긴이의 머리말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책은 우리 고소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려고, 옛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어 고소설 작품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당대 소설 전기’ 20편을 엄선해 편찬하고, 해설을 붙여 번역 저술한 것이다. (<머리말>에서)

 

따라서 각 작품의 해설에 해당 작품이 영향을 미친 우리나라 고소설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어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왜전><이춘풍전>, <옥단춘전>과 관계가 있으며, <배항전><운영전>,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앞서 읽은 책과 중첩되는 작품은 특기할 사항이 아니면 생략하고, 새로 읽은 작품 위주로만 간략하게 평을 남긴다. 앞서의 책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됨은 어쩔 수 없다.

 

1장 애정(愛情) 소설류 : 이왜전, 곽소옥전, 앵앵전, 비연전, 장한가전, 유선굴, 이혼기

 

<이왜전>은 젊은이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극적인 인생 반전과, 개과천선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이왜의 변신이 결합하여 여전히 큰 재미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상투적인 교훈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젊은이를 죽을 지경까지 매질하고 버려두는 장면과, 훗날 아버지가 아들과 이왜의 결합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정식 혼인 절차를 밟게 하는 장면은 당대의 문화와 관습의 중요성을 짐작게 한다.

 

<곽소옥전>은 곽소옥을 배신하는 이생의 비겁하고 비열한 행동에 여전히 분개할 수밖에 없다. 곽소옥이 이생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닌데, 그렇게까지 냉정하고 잔인한 처사를 해야 했을 것인가? 곽소옥이 한을 품고 저주함은 당연하다. 다만 이생의 부인들이 덩달아 애꿎게 고초를 겪어야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지나친 감이 있다.

 

<앵앵전>은 먼저 유명한 회진시(會眞詩)’ 30운 전문이 수록하고 있어 앞서의 책과는 차별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장생의 초반부 호언장담이 훗날 자신의 행동과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야말로 진정한 호색자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대저 모든 사물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것은 마음속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냉정하게 맺었던 정을 던져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P.57)

  

은나라 주왕과 주나라 유왕의 고사를 언급하는 대목은 확실히 비겁한 변명이다. 앵앵을 나라를 망친 여인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앵앵에 대한 장생의 변심 원인도 어렴풋이 찾을 수 있는데, 앵앵의 적극성이 당시는 좋았을지 몰라도 훗날 오히려 의구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앵앵도 이를 알아차린 듯하다. 어쨌든 인연이 아닌 남녀의 만남은 헤어짐이 불가피하지만 만남과 헤어짐에 있어 예의와 존중은 필요하다.

 

어찌 기약했겠습니까? 군자를 보고 정감을 억제치 못해 스스로 남자에게 몸을 던져 맡겨버리는 부끄러움을 이루리라는 것을... 다시는 분명하게 받들어 모실 수 없게 된 것이 죽을 때까지 영원한 한이 되고 말았으니 한탄을 품은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P.67)

 

<비연전>에서 비연과 조상의 애정 행각은 윤리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불륜이고 잘못이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윤리의 틀에 좌우될 성질의 것인가를 보면 당대는 물론 현대에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부정인 줄 알면서 원하는 남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 모든 비난과 피해는 유혹자가 아닌 피유혹자가 죽음으로 감내하게 되고 만다. 영혼이 된 비연의 말은 섣부른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지 말라는 경고다.

 

선비들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당신의 행동은 완전무결한지요? 어찌 거만스럽게 한 마디 말로써 꾸짖고 비난하여 괴롭게 합니까?” (P.87)

 

<장한가전>은 백거이의 장한가탄생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연을 장한가전문과 함께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이 또한 앞서의 책보다 나은 점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유선굴(遊仙窟)>이다. 신선의 굴에서 노닌다는 표제처럼 주인공이 속세를 떠난 곳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하룻밤 사랑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다른 작품들보다 월등히 긴 분량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또한 매우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어 운문의 비중이 큰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양만 많은 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어 사건 전개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시가 담당하도록 하고 있음도 특기할 만하다.

 

선녀와도 같은 여인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며 그녀와 올케언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이 바라는 것은 그녀와의 뜨거운 하룻밤이다. 미모에 대한 낯간지러운 찬미는 유혹의 상투적인 필수 단계이리라. 올케언니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녀에 대한 육체적 결합에 성공하는 여정을 점층적으로 전개하는 점과 은유적인 외설 시구를 보면 단순한 애정소설보다는 성애소설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한 것은 그 머리 뾰족한 것이, / 종일토록 하는 일없이 가죽 속에 박혔음이라. (P.133)

자주 드나들어 꺼풀이 응당 느슨해졌지만, / 빈번하게 문질러서 쾌감은 되레 더해졌도다. (P.134)

오직 다리를 위로 번쩍 추켜올리게 된다면, / 그놈은 스스로 두 눈을 번쩍 뜨겠구먼. (P.140-141)

배꼽 아래를 잡아당겨 들어가게 할 것 같으면, / 백발도 쏘게 되어 맞추는 수가 많아진다오. (P.146)

 

주인공과 십랑은 하룻밤 이후 작별을 하는데 곧 이별을 암시하고 있다. 십랑이 속계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다시 접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정식 절차를 거친 당당한 만남이 아니라는 점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2장 별세계(別世界) 소설류 : 배항전, 보강총백원전, 침중기, 남가태수전, 유의전, 이위공전전, 이장무전, 정혼점

 

<배항전>은 우연한 인연으로 배항이 선녀와 혼인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가 운영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선군, 선녀, 옥황상제 등 도가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강총백원전>은 창작 의도가 여전히 구양순을 향한 비난과 예찬 중 어디에 해당할까 생각하게 한다. 다만 구양흘이 전쟁터에 아내를 동반한 점은 무리한 설정이다. 동료와 부하들이 전적으로 목숨을 거는 곳에 홀로 예쁜 아내를 데리고 간 그를 바라보면 어떤 심정일까?

 

<남가태수전>의 결론은 다소 허무주의적이다. 만사가 허황한 것이라면 인간은 이생에서 무슨 의미로 생을 꾸려나갈 것인가. 비록 높은 곳에서 보면 우글대는 개미들에 불과하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의전> 또한 도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유의의 마음과 전당군의 위력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지조는 마침내 용녀 아내를 얻게 한다. 인간과 용의 결합이라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전혀 해괴한 게 아님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넘어서 인간과 귀신의 교합을 보여주는 작품이 <이장무전>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은 한계를 모른다. 선녀, 변신한 동물에 이어 죽은 영혼까지도 욕망을 갈구하는 대상으로 변모시키다니. 하긴 요즘은 좀비물조차도 좀비와 연애하는 컨셉도 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겠다.

 

<이위공정전>은 당나라 초기의 명장인 이정(李靖)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승상이 되지 못한 이유를 불가항력적인 데서 찾고 있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정혼점> 역시 비슷하다. 남녀의 혼인은 어릴 때 하늘이 맺어준 운명이므로 제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위고의 기이한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3장 호협(豪俠) 소설류 : 곤륜노전, 무쌍전, 홍선전, 섭은낭전, 사소아전

 

<곤륜노전>의 결말 대목은 앞서의 책과 차이가 있다. 앞서서는 권력자가 곤륜노의 능력에 감탄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고자 하는 의사를 비치지만, 여기서는 권력자가 곤륜노의 능력을 일종의 재앙으로 간주하고 그를 제거하려고 군사를 보낸다.

 

<무쌍전>의 결말은 더욱 충격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협객 노인이 무쌍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본인을 포함하여 10여 명의 목숨을 해친다. 이는 구출 과정의 영원한 보안을 위한 나름의 불가피한 조치라고 협객은 밝히지만, 독자와 작가의 생각은 분명 다르다. 두 사람의 사랑 실현이 과연 많은 목숨을 억울하게 바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앞서의 책에서 편역자가 임의로 윤색하여 희생자가 없도록 하고 있음은 이런 의문에 기인하여 나름대로 조처한 것으로 보인다.

 

무쌍이 난리를 만나 가정이 적몰되어 궁녀로 들어가고, 왕선객의 구출하려는 노력은 목숨을 걸었도다. 마침내 그 노인을 만나 기이한 방법을 통하여 무쌍을 구출했고, 이 과정에서 원통하게 목숨을 바친 자 10여 명에 달하였다. (P.294)

 

<섭은낭전>은 기이하다. 그녀가 무술에 정통하게 된 과정이 그러하고 유 절도사를 섬겨 암살에서 구해낸 점 등도 마찬가지다. 다만 과유불급이랄까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과장하여 그려내다 보니 일반의 사람답지 않은 점이 두드러진다. 은낭의 아버지가 그녀에 대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사소아전>은 부친과 남편의 원수를 갚는 여인의 사연을 나타낸다. 죽은 영혼이 꿈속에 나타나 범인의 이름을 수수께끼로 알려주며, 작가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여 이를 해석하여 범인의 실체를 밝혀 주는 대목은 이채롭다.

 

이 책은 앞서의 책에 비하며 확연하게 원문에 충실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작중의 시는 번역문과 원문을 병기하고 있으며, 작품 원문 전체를 책 후반부에서 별도로 싣고 있어 원문 또는 한문에 관심 있는 사람이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당대 전기소설을 감상하고 싶은 독자라면 두 책 중에서 이쪽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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