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기, 괴담의 문화사
김지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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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기(搜神記)>는 중국 동진의 역사가인 간보가 쓴 지괴소설집이다. 표제 그대로 귀신 이야기 모음집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정사를 집필한 역사가이자 유학자가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썼다니 특이하면서도 이례적이다. 중국 소설사에서 보았을 때 위진남북조 시기의 지괴류 이야기는 소설로 간주하거나 소설이 아닌 단순히 설화 모음으로 판단하는 등 애매한 영역에 걸쳐 있다. 다만 중국 소설의 기원에 해당하는 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앞서 읽은 <신이경>의 옮긴이다. 후기에서 비주류의 지괴 장르를 전공한 애환을 밝혔듯이 보기 드문 지괴류 전공자로서 <수신기>의 내용을 통해 위진남북조의 귀신 이야기가 담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당대인들의 현실과 원망을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표제의 괴담의 문화사가 이를 의미한다.

 

귀신 이야기는 적어도 잠깐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종교적.민속적 맥락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공포보다는 연민의 시선으로, 자극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귀신을 바라보고 타자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P.198)

 

자칫 이런 유형의 저작은 대중의 흥미에 영합하기에 십상이다. 선정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선별하고 흥분을 부추기는 쪽으로 해석을 덧붙이면서. 시종일관 저자의 어조는 차분하다. 이야기를 흥미 위주로만 가볍게 읽고 스쳐 지나가지 말 것을 독자에게 신신당부한다. 이야기에 담겨진 당대인들의 희로애락과 꿈을 놓친 게 있는지 천천히 음미해볼 것을 되풀이하여 권유한다.

 

<수신기>는 이렇듯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단지 호기심으로 접근하지 말고, 천천히 다양한 방법으로 읽고 음미해보라고 말이다. (P.61)

 

<수신기>에서의 신()은 포괄적 개념이다. 신성한 신보다는 신선, 도인, 귀신에 가깝고 신비, 신기, 기이와도 통한다. 보통 사람의 이해로 파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신()으로 간주한다.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하다. 영험한 초능력을 지니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에 우리는 경외감을 품는다. 천년 묵은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나 홍콩 영화를 통해 이미 친숙하다. 우리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귀신은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 의의를 지닌다. 하찮은 벌레나 사물에도 영혼이 있고 신기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에 쉽사리 거부하지 못 한다.

 

왜 우리는 괴담에 끌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이다. 유한한 이해의 한계 내에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우주 자연의 일부로 스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에 있다. 제아무리 이승의 권세가 막강하더라도 세월의 흐름을 이겨낼 수 없다, 진시황도 한 무제의 바람도 헛될 뿐이다.

 

귀신이나 영혼은 저 너머의 세계, 죽음을 연상시킨다. 당연히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부적이나 주문 등으로 귀신을 제압하고 무덤 속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죽은 혼을 불러들여 산 사람과 만나게 해주는 이야기는 일종의 위안이 된다. 이야기만으로도 인간은 죽음과 귀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P.35)

 

공포는 생소와 무지에서 비롯한다. 이미 알고 있는 현상과 존재라면 두려움을 극복할 여지가 생긴다. 게다가 무서운 이야기는 재밌기 마련이다. 무서워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쳐다본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귀신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던 공자도 후대에 괴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국이다. 금지한다고 외면한다고 B급 장르가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는 솔직해져야만 한다. 오랜 억압과 무시에도 질긴 생명력을 발휘한다면 존재 의의를 인정해야 함을. 인간이란 존재의 내면에 이것을 향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결코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장르가 여전히 쓰이고 읽히고 있는 데에는 문화사적.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 내면에는 너무도 다양한 감정들이 얽혀 있어 기쁨과 슬픔, 감동 등과 마찬가지로 공포, 기괴함, 섬뜩함 등의 감정들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P.194)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뀔 수 있다.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신선과 도사에 대해서는 범인의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고자 하는 바람을, 남가일몽 같은 부질없는 꿈에서도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을 소망하는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삶이, 현실이 힘겨울수록 사람은 꿈에 기대고자 한다. 저자는 오히려 더 많은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부가 서로를 잡아먹는 이야기는 황당하고 기괴하다. 과연 사실일까 의심스럽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까? 저자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풍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목이 잘려나가도 굴하지 않는 형천 이야기와 적비 이야기는 기괴하고 끔찍함에 앞서 불굴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구미호 하면 떠올리는 팜므 파탈이 사실은 여우의 여러 가지 변신 중의 하나임을 떠올리면 상상력을 구속할 필요가 없다.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의 다방면에서 지괴류의 괴담은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얄팍한 호기심과 욕망을 채워줌과 동시에 그것이 정형화된 인간과 사회의 틀을 벗어나고 자유롭고 무한한 사고와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해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괴함은 익숙한 질서를 교란하고, 폐쇄되어왔던 사유를 개방하게 한다. 정신의 해방, 그것이 우리가 판타지를 읽는 이유가 된다. (P.75)

 

열린 시선으로 이계를 바라보는 자만이 사유의 확장, 정신의 자유를 얻게 된다. (P.102)

 

간보는 <수신기>에 실린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를 따지지 말고 즐겁게 읽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사람의 확인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 있음을 인정하자는 동시에 이야기 자체의 흥미성을 중시하자는 뜻이리라. , 더더욱 <수신기>를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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