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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경 - 지만지고전천줄 38
동방삭 지음, 김지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얄팍한 이 책을 펼쳐 든다면 황당함을 느끼게 된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하며 책장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언급하는 항목은 사실과 무관하며, 이성과 상식을 초월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적으로 독자의 선택이다. 오죽하면 책 제목도 신기하고 기이하다고 붙여놓았으니 말이다. 저자는 누군가? 장수의 대명사로 유명한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해설에 따르면 원저자는 알지 못하며, 동방삭의 이름을 가탁한 것으로 간주한다.
<산해경>과 내용과 형식 면에서 유사하여 영향을 받았음이 인정된다. 곳곳에 보이는 도교적 색채는 이 책이 <산해경>과 차별되는 지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와 독자는 여기에 수록된 황당하고 기이한 인물과 사물, 현상을 진실로 수용할지 아니면 단순히 흥미를 끌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할지 궁금하다. 의도를 갖고 지어낸 이야기로 볼 만한 진술을 간혹 찾을 수 있다.
[선인(善人)]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배시시 웃기만 하니 언뜻 그들을 보면 마치 바보와 같다. (P.24)
[불효조(不孝鳥)] 하늘이 이 기이한 새를 만든 것도 (이를 본보기로 하여) 충효를 보여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P.161)
선을 행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현실, 충효의 미덕이 상실되는 세태를 풍자하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오늘날도 착한 사람은 바보로 불리게 마련이다.
<신이경>의 가치는 학술적으로 <산해경>과 더불어 중국의 신화와 전설의 중요한 원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현대에 와서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하는 문화콘텐츠의 원천이기도 하다.
서왕모(西王母)는 애초 성별도 불분명한 존재였는데 여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여성이며,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배우자를 갖게 되었다. 동왕공은 동황경 동왕공 편에 처음 나타나며, 중황경 곤륜천주 편에 희유(希有)라는 큰 새를 통해 서왕모가 남편을 만나러 이동한다고 풀이한다. 음양 사상과 부계사회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성인(聖人)] 사람들이 다니는 땅의 지리에 밝고 백 가지 곡식 중 먹을 수 있는 것과 못 먹는 것을 분별해 내며 풀과 나무 중 어느 것이 짜고 쓴 것인지를 안다. 이름을 성(聖)이라고 하며, 일명 철(哲), 선(善), 통(通), 무부달(無不達)이라고 한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들을 보면 절을 하는데 신령함과 지혜로움을 느끼게 된다. (P.79)
성인의 판단 기준이 매우 실용적임을 보게 된다. 유학 경전을 잘 외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에게 유용하고 삶을 풍족하게 하는 사람이 성인이다. 한대에 이미 교조화된 유학의 폐해가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산물이다. 승자의 관점에서 미화되고 보전되며 패자는 잊혀지거나 왜곡된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 황제의 후손인 전욱과 싸워 패한 염제의 후예 공공이 그러하다.
[공공(共工)] 오곡과 금수를 먹으며 음식을 탐내고 미련한데 이름을 공공이라고 한다. (P.113)
현재도 중국 소수민족으로 존재하는 묘족(苗族)에 관한 기록도 보인다. 요와 순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들의 지위 전락이 참담하다.
[묘민(苗民)] 천성적으로 재물과 음식을 탐내며 음란하고 방종한데 이름을 묘민이라고 한다. (P.95)
혼돈(渾沌)이라는 짐승에 대한 서황경 혼돈 편의 소개는 독특하다. 인간의 지성이 있지만 덕을 싫어하고 악을 좋아하는 천성이라고 하니 혼돈 자체에 대한 당대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주석에서는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며 동물보다 못한 비열한 인간에 대한 풍자라고 풀이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고니에게 잡아먹히는 곡국인(鵠國人), 잡아먹으면 충치에 물리지 않는다는 주의소인(朱衣小人), 물고기와 사람으로 변신하는 횡공어(橫公魚) 등은 물론 암컷밖에 없어서 인간 남자와 교합해야 새끼를 밴다는 주수(綢獸)라는 동물이 그러하다.
저자는 옥계(玉鷄)와 천계(天鷄), 화서(火鼠), 박보(朴父) 같은 기이하고 상상력이 극대화된 존재들도 다루고 있지만, 사람과 동물의 선과 악에도 민감하다. 악독하고 간사한 존재인 환두(驩兜), 도철(饕餮), 혼돈, 궁기(窮奇)가 한편이라면 무로지인(無路之人), 해치수는 사람이나 만물을 해치지 않으며 정직한 존재이다. 세상에 악이 득세하지만 선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이해하고 싶다.
[해치수(獬豸獸)] 천성적으로 충성스럽고 정직하다. 사람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잘못한 사람을 들이받고 말싸움하는 것을 들으면 거짓말한 사람을 물어 씹는다. 이름을 해치라고 하고 일명 임법수(任法獸)라고도 한다. (P.169)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 대한 기초지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반대로 이 책을 통해 중국 신화와 전설의 원류를 확인할 수도 있다. 대중적으로 될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을 가진 책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일독한 가치는 충분하다.
옮긴이는 충실한 번역문, 원문, 꼼꼼한 주석의 형태로 독자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 원전의 분량이 많지 않기에 완역을 하였으며, 산일 된 몇 편도 함께 수록하여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