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효 판소리 사설집 - 쉽게 풀어 쓴
최혜진 외 지음 / 민속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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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가사가 있는 성악곡이다. 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반쪽짜리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지 못할 언어로 노래하는 외국 성악곡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판소리 가사, 즉 사설을 최초로 정리한 인물이 신재효다. 과연 판소리 사설을 읽다 보면 현재 공연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기본 골격이 이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변강쇠가>는 지금은 사라진 악곡의 흔적이나마 찾아 음미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굳이 이 사설집을 읽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독자들은 전반적 내용을 꿰뚫고 있다. 옛날이야기, 동화책, 판소리계 고전소설,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익숙한 작품들이다. 특히 판소리계 소설과는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친연성이 높다. 따라서 사설과 소설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오늘날 다섯 마당이 살아남은 것은 무엇보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사랑, , , 우애 등과 같이 사회의 기본 윤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변강쇠가>의 소멸은 이것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머리말에 따르면 수록된 사설의 판본은 아래와 같다.

 

가람본 : 춘향가(동창)

성두본A : 박타령

성두본B : 춘향가(남창), 적벽가, 변강쇠가

신씨가장본 : 심청가, 토별가

 

춘향가 남창(男唱)

현전 판소리와는 분위기, 줄거리 및 사설이 제법 차이 난다. 여기서 춘향은 퇴기 월매의 딸로서 대비를 넣어 기생 신분을 면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상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이도령과 연분은 어디까지나 사랑받는 첩”(P.16)으로서임을 자각한다. 광한루에 놀러 가고, 그네 타는 춘향에게 매혹되어 유혹하며, 춘향과 사랑가를 벌이는 장면 등이 오늘날 판소리 사설과는 다르다. 좀 딱딱하고 밋밋하여 아기자기한 멋이 부족한 게 남창인 연유이리라.

 

춘향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선녀가 밝은 미래를 약속해 주었기에 걸인 꼴인 이도령을 옥중상봉 해도 오히려 이도령이 당황할 정도다. 신관 사또의 죄명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기생이 아닌 춘향을 강제로 수청들도록 강요하여 불응하자 감옥에 가둔 죄. 그리고 어사또가 남원 민심을 살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고리대금과 송사로 농민을 수탈하는 죄다. 만약 동창에서와 같이 기생 신분임에도 신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였다면 춘향의 처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조치였을뿐더러 사또를 모욕한 죄목이 훨씬 더 중하였을 것이다.

 

춘향가 동창(童唱)

동창은 춘향과 이도령이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미완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설은 오히려 현대에 가깝다. 보다 섬세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해학성도 더 짙다. 현대 판소리는 남창과 동창을 결합한 구조에 해당한다.

 

여기서 춘향의 신분은 명확하게 기생(“퇴기 월매 딸 춘향이란 기생”(P.79))으로 제시된다. 기생인만큼 춘향의 성격도 남창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희로애락이 분명하며 직설적이고 화끈하다. 춘향이가 방자에게 쏘아붙이는 말투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사랑가 장면에서도 동창은 사랑가 전에 춘향의 옷을 벗기는데, 남창은 사랑가 후에 옷을 벗기는 차이가 있고, 이별 통보에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춘향의 행동은 더 사실적이며 인간적이다. 동창 춘향가의 마지막 대목은 오리정 이별인데, 담담한 남창과 달리 매우 정서적이어서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다.

 

심청가

심청가의 묘미는 극적인 신분 상승의 대조에 있다. 전반부는 온통 슬프고 애달프며 딱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다가 인당수 이후 심청의 처지는 일거에 뒤바뀌어 황후가 된다. 맹인 잔치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지만 청중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전반적 작품 기조에서 분위기의 균형과 대비를 유지하는 역할이 심봉사와 뺑덕어미에게 맡겨진다. 사설 초반에 심봉사는 비록 맹인이지만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검하고 지조가 경개하여 모든 행동을 경솔히 아니 하니 사람이 다 일컫더라”(P.111)일 정도로 품위 있는 인물이지만 우리가 보는 심봉사는 차라리 해학적 인물이다. 심청가에서 전혀 뜻밖일 정도로 걸쭉한 육담과 해학미가 역시 이 장르가 대중적 취향임을 드러낸다. 방아타령이 전형적이다.

 

어디, 하여 볼까? 뒷소리를 잘 맞추렸다! 이내 몸이 방아 되고 주장군이 고가 되어 각씨님네 옥문관을 밤낮으로 찧으면, 다른 물 아니 쳐도 보리방아 절로 익제.” (P.165)

 

토별가

해학미 하면 별주부와 토끼가 벌이는 한판 지략 대결도 놓칠 수 없다.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니다 보니 표현상에 한껏 자유분방함과 환상성이 배어있다. 육담이 주는 골계미도 만만치 않다. 물개가 별주부에게 자신이 친척 아저씨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오늘날 판소리와 소설과는 결말이 다른데, 창자가 들려주는 도덕적 교훈은 결국 창작의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자라와 토끼란 게 모두 미물로서 장한 충성 많은 의사 사람하고 같은 고로 타령을 만들어서 세상에 남겨 전하니 사람이라 명색하고 토끼와 자라만 못하면 그 아니 무색한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P.216)

 

박타령

흥부와 놀부는 너무나 유명한 전래동화 캐릭터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놀부[놀보]가 현대인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흥보는 착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무기력한 소시민에 가깝다. 게다가 자기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자식만 스물다섯을 낳아서 무책임할 정도로 가난에 방치한다. 요즘이라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수준이다. 이러니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흥보가 마뜩잖은 것이다.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덕석을 쓴 채로 앉아 누어,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을 디뎌본 일이 없다. (P.230-231)

 

유명한 박 타는 대목에서 전혀 의외의 대목이 나오는데, 셋째 박에서 양귀비가 나타나서 흥보의 첩이 되는 장면이다. 현전 판소리와 소설에서는 일체 이러한 내용이 없다. 당대 청자의 솔직한 욕망을 반영하였으리라고 추정되지만, 가치관의 변화에 발맞추어 부적합하다고 여겨 언제부터인가 제외된 것이리라.

 

놀보 집안의 결정적 패가는 놀보의 상전 노인의 등장에서 시작한다. 요점은 놀보가 천민 출신이라는 점이고 놀보는 속량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다시피 한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계급의 구별은 엄격한 점이었기에 놀보가 사색이 될 수밖에 없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놀보가 천민이면, 흥보도 마찬가지일 텐데. 주인공을 천민으로 만들어 놓으면 자가당착이 아닐는지.

 

여보시오, 주인님, 이 동네가 반촌, 양반의 고을이요, 아비의 가세가 요부키로 갓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온 동네에 모모한 양반 댁이 모두다 사돈이오.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꼴이 우스우니 사정을 봐서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량으로 바칠 테니 면천이나 하여 주요.” (P.273-274)

 

적벽가

나관중의 작품에 뿌리를 둔 <적벽가>는 현대 판소리의 사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전히 제갈공명은 지략이 뛰어나며, 주유는 한 방 먹으며 애석해한다. 조조는 안하무인에, 깐족거리는 입 때문에 화를 자초한다.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이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그대로 소리에 담아내고 있다. 원작 소설에 없는 군사 설움 대목이 중시되는 까닭은 전쟁이라 결국 지배층의 이익을 위함이요, 힘없는 민초에게는 오직 고통과 슬픔을 안겨줄 뿐임을 토로하고 있어서다.

 

변강쇠가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적인 B급 캐릭터로 단단히 자리 잡아서 그네들의 이름만 언급해도 대부분 민망한 웃음을 자아낼 정도다. 확실히 작품 초반에는 음란물의 한 장면과도 같은 노골적이며 해학적인 성기 묘사(P.355-356)가 존재하지만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달리 보면 성적인 기준에서 전통적 보수성을 탈피하고 현대적 성 관점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강쇠의 평생 행세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할 수 없어 애긍히 말한다. (P.359)

 

변강쇠는 사설 내내 확실하고 고정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바로 음남이자 잡놈이라는 것이다. 반면 옹녀는 우리가 아는 바와 많이 다르다. 즉 우리가 아는 음녀옹녀는 없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대목에서 옹녀와 변강쇠의 행동은 대비된다. 옹녀는 어떻게든 살림을 유지하여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강쇠는 음주, 도박, 계집질 등으로 전혀 보탬이 안 된다.

 

후반부에서 장승을 베어 땔감으로 썼다가 저주받아 시체가 된 강쇠의 뒤끝은 더욱 남다르다. 유언조차 옹녀보고 자진하라고 요구하고 송장을 수습하려고 온 뭇 남성들은 모두 급살맞게 해버린다. 그야말로 시체의 저주라고 할밖에.

 

입관하기 자네가 손수하고 출상할 제 상여 배행도 하고, 시묘 살아 조석 상식 삼년상을 지낸 후에 비단 수건 목을 졸라 저승으로 찾아오면 이생에 미진한 연분, 끊어진 줄을 잇는 것이 되려니와, 내가 지금 죽은 후에 사나이라 명색하고 십 세 전 아이라도 자네 몸에 손 대거나, 집 근처에 어른거리면 즉각 급살할 것이니 부디 부디 그리하소.” (P.375)

 

우여곡절 끝에 강쇠의 시체는 동강 나고 남자들은 떠나가고 옹녀 홀로 남는다. 사설은 더 이상 옹녀의 장래를 언급하지 않는다. 혼자는 살 수 없기에 개가를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여성 옹녀에게 동정심이 쏠리는 것은 아마 인지상정일 것이다.

 

예전에 문고본으로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비하면 사설의 여러 대목이 더욱 잘 이해되고, 입속으로 읽다 보면 저절로 리듬감이 생겨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사설 내용 자체는 백 년도 더 전 옛 시기의 것이어서 요즘 어휘와 문화로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부지기수다. 특히나 고전을 인용하는 사례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순전히 사설만 수록하였을 뿐 일체의 주석은 달지 않고 있어 철저하게 독자의 손에 맡기고 있다. 독자들이 사설의 세부 내용을 얼마나 속속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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