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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장원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8
윌리엄 허드슨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평점 :
주로 아동 청소년 문학으로 소개되던 작품이다. 원제는 <Green Mansions>인데, 화자가 나중에 리마와 조우하게 될 울창한 원시림을 산마루에서 조망하며 감탄하는 대목(P.77)에서 따왔다. 다만 자연미에 대한 순수한 예찬과 함께 소유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면 나의 기우일까.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이국적 배경의 로맨스 소설이다. 한 젊은이가 황금을 찾으러 당대로서는 낯선 지역인 베네수엘라 남부의 아마존을 배경으로 원주민들과 맞닥뜨려 겪게 되는 모험이 작품 내내 이어진다. 화자 아벨과 신비한 처녀 리마와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중시한다면 이 소설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추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험과 사랑, 흥미진진한?
작품 전개에서 손에 땀을 흘릴 정도로 극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의외로 드물다. 노다지를 향한 주인공의 기대감은 이미 전반부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중반 이후부터는 그와 리마, 그리고 야만인 루니 일족 간의 적대적 삼각관계가 주를 이룬다. 전형적인 모험소설과는 달리 주인공은 사랑과 모험에서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환멸뿐.
작가가 중점을 두어 강조하는 대목은 자연 묘사에 있다. 서양인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아마존의 오지. 오직 자연 그대로만 있을 뿐으로 기후와 지형, 숲과 동식물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담백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미사여구로 장식하지 않았음에도 아마존 오지의 온화함과 강렬함을 과부족 없이 잘 살리고 있는데, 박물학자로서의 이력을 새삼 깨닫게 한다.
폭풍 같은 움직임과 혼란스러운 소음이 지나고 나자 숲의 적막이 굉장히 깊게 느껴지더군.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금세 기막히게 아름다운 새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네. 환상적으로 순수하고 표현이 풍부해서 이전에 들어본 그 어떤 음악 소리와도 달랐지. (P.50)
작품의 핵심적 내용은 아벨과 리마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과 죽음이다. 리마는 작품 내에서 신비하게 등장한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리마의 정체는 끝내 애매하게 마무리된다. 그녀의 고향인 리올라마가 어디에 있는지, 그녀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종족들의 운명은 어찌 된 것인지도 안개에 잠긴 채 말이다.
리마가 아벨을 만나지 않았다면, 숲의 파괴와 리마의 죽음 모두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숲의 여신으로서 자신의 순수한 힘을 통해 숲과 숲속 생물과 더불어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을. 누플로는 리마의 생활방식을 따를 순 없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그 아이가 꽃 피우고 노래하는 그 넓은 숲에서는, 그 아이의 집이자 정원이고 그 아이가 만물을 관장하는 그 숲에서는, 색칠한 날개를 지닌 작은 나비 한 마리조차 그 애의 말을 듣는 그 숲에서는 난 동물을 한 마리도 잡지 않소이다. [......] 그 숲에서 법은 하나뿐이거든. 리마가 정하는 법. 그 숲 밖에서는 다른 법이 적용되고. (P.154)
물론 리마는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자신의 감정이 아벨에게 이해되고 응답받고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행복은 본디 찰나라고 했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해 떨어지는 순간 아벨을 외친 그녀의 심정은 사랑과 그리움, 두려움과 원망의 중간 어디쯤이었을까.
리마와의 앞날을 꿈꾸던 아벨의 복수는 처절하고 냉혹하며 스스로 인정했듯이 야만적이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야만인보다도 더욱. 지성을 갖춘 계몽된 서구 귀족은 더 없다. 복수에 혈안이 되어 무자비한 칼을 휘두르는 한 남자 외에는. 복수에 성공하였으니 아벨의 심정은 후련하였을까. 루니 일족에 대한 학살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을까. 이후 전개되는 그의 신체적, 정신적 방황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녀를 보금자리인 숲을 떠나게 만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는 점과,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리마는 동족을 찾으려는 욕구가 커졌다는 사실을 그는 부정하지 못한다. 원주민 일족의 학살과, 리마의 유골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자책감의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아벨의 고백은 당대의 관점으로는 충격적이다. 허무주의적인 동시에 비기독교적이므로, 신에게서조차 용서받지 못할뿐더러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아벨이.
그녀는 말했네. 천국마저도 내가 한 일을 돌이킬 순 없다고. 또 내가 나를 용서하더라도 천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 또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나의 철학으로 남아 있네. 기도도 금욕도 선행도 전부 아무 소용 없고, 중재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의 바깥에는 죄를 사하는 천국도, 죄로 가득한 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P.370-371)
이 작품은 모험소설의 외형을 빌리고 있지만 대중소설의 값싼 감상과는 거리가 멀다. 아벨과 리마의 교감은 매우 은은하고 정묘한 정서에 기반하다. 아벨이 쿠아코를 죽이는 장면, 마나가 일족을 꼬드겨 루니 일족을 몰살시키는 대목도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묘사를 통해 대중의 흥미를 돋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탓으로 그는 후대에 잊혀진 작가가 된 것이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곳곳에서 드러나는 인종주의적 견해가 제법 눈에 거슬린다. 이는 그만의 개인적 오류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이니 어찌하겠는가. 후대의 우리로서는 작가가 그려낸 환상적인 작품 세계에 빠져들되, 인종주의 결함을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골즈워디가 쓴 서문은 이 작품의 진가를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단순한 낭만적 서사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빛으로 은은히 채석되어 산문시로 승화되었다. 이 이야기는 질적인 품격에서 한 번도 이탈하지 않으면서, 이승에서 완벽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얻고자 하는 인간 영혼의 갈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