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리스 - 전예원 세계 문학선 325 셰익스피어 전집 325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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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타이어(Tyre)는 영어식 발음인데, 오늘날 레바논지역의 도시 이름이다. 티레, 티르, 티로 등이 원래 명칭에 가깝다. 이 작품은 타이어, 앤티어크[안티오크], 에페서스, 타서스[타소스], 펜태폴리스[펜타폴리스] 등과 같이 동지중해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이 작품과 <겨울 이야기>, <심벌린>, <템페스트>, <두 귀족 친척>을 일컬어 낭만극 또는 로맨스극이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의 최후기 희곡들은 희극이지만 초기의 희극과 명확히 구별되며, 같은 비희극이지만 문제극과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 작품을 대하면 차이점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우선 형식 면에서 막마다 서사가 있어서 막간의 사건 경과를 설명해 준다. 때로는 무언극을 추가하여 더 가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내용 면에서 차이는 더 두드러지는데, 1막부터 종막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온갖 역경과 불행에 맞닥뜨린다. 결말은 희극으로 끝나지만 비극적 성격이 압도적이다. 주인공이 겪는 고초는 인간에 의한 게 아니라 운명과 자연 등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감내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중기의 비극과도 구별된다.

 

세 번째, 고전 희곡은 삼일치의 법칙을 대체로 준수하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큰 틀에서는 이를 따른다. 이 작품은 시간과 장소에서 그의 작품 중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보인다. 시간으로는 페리클리스가 구혼하러 앤티오크를 방문하는 데서부터 성인이 된 딸 마리나와 재회하는 장면까지 수십 년을 가로지르며, 공간으로는 앞서 말했듯 동지중해의 다채로운 국가들을 넘나들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페리클리스와 그의 아내 타이사, 딸 마리나가 그러하며, 충신 헬리케이너스와 타이사의 생명을 구한 세리먼도 마찬가지다. 라이시머커스는 고결하다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데, 클리언과 다이어나이자에 비하며 훨씬 낫다. 클리온은 자체로서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내와 딸을 향한 쏠림을 극복하지 못한 소심함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라이시머커스) 내가 결코 야비한 의도를 갖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라. 이 문들이고 저 들창들이고 내겐 구역질이 난다. 그럼 잘 있거라. 넌 미덕 그 자체이다. (P.125, 46)

 

고매한 성격의 극치는 마리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해적에게 붙잡혀 유곽에 팔려 가지만, 매춘부로 타락하기를 거부한다. 찾아온 손님들에게 신성한 설교를 하여 개심시켜 유곽 판을 떠나게 하고, 태수 라이시머커스를 감복시킨다. 4막에 등장하는 유곽 장면은 셰익스피어가 원작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추가한 부분으로서 전반적으로 무겁고 진지한 극 분위기에 이색적이면서 해학적인 면모를 제공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페리클리스의 개인사를 꼬이게 만든 계기는 근친상간을 알아차린 그에게 복수하려는 앤티어크의 왕이다. 앤타이어커스 왕과 공주의 비윤리성은 훗날 페리클리스와 마리나의 도덕성과 윤리성에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페리클리스는 자신으로 인해 고국이 침략당할까 우려하여 잠시 외유를 떠난다. 이후로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이 개입한다. 타서스를 떠났을 때와 펜태폴리스에서 고국으로 귀향할 때 각각 거센 폭풍우에 맞닥뜨린다. 전자에서 그는 펜태폴리스로 떠내려가 결국 아내를 얻지만, 나중의 폭풍우에서 그는 아내를 잃게 된다. 즉 폭풍우는 그가 가족을 이루도록 하다가 다시금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맡는다.

 

영주는 타서스에 더 오래 머물러 있지 /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영주는 이 충언을 전해 듣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 그곳 바다도 그에겐 평온하지는 않은 곳이었습니다. / 바다에 나가자 갑자기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쳐 / 머리 위에선 천둥이, 다리 아래에선 거센 파도가 / 뒤끓고 그를 지켜야 하는 배도 나뭇잎처럼 / 희롱 당하다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P.50-51, 2막 무언극)

 

그들의 배가 / 해양의 높은 파도에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겨우 바다 / 한 가운데쯤 지났을 때 변덕쟁이 운명의 여신이 / 또다시 변덕을 부려 사납게 휘몰아치는 북풍은 / 태풍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때문에 / 가엾게도 배는 오리처럼 물 속에 잠겼다가 물위에 / 뜨곤 하면서 겨우 파도를 헤쳐 나갔습니다. (P.81, 3막 무언극)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과 운명의 위력 앞에서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기 마련이다. 페리클리스가 상실한 가족의 기억을 털어버리고 새 출발 하였다면, 마리나가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여 유곽의 일개 매춘부로 영락하였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맞는 행복한 결말에는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앤타이어커스 왕과 공주는 표피적 본능에 이끌려 천륜을 어겼으며, 클리온과 다이너나이자는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은혜와 도덕을 모두 외면하였으니 그들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하였다. 5막 종장에서 서사역의 가워는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한다.

 

(가워) 앤타이어커스와 그의 딸 사이에 있은 / 불륜은 당연하고 정당한 응보를 받았습니다. / 페리클리스와 왕비, 공주에게는 한때 / 가혹하고 격렬한 악운이 그들을 괴롭혔으나 / 미덕은 잔인한 파멸의 폭풍을 견뎌내고 / 신의 가호로 결국 기쁨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P.155, 5막 종장)

 

결론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가족 상봉을 이루었고, 마리나는 라이시머커스와 결혼하게 되니 두루 잘 마무리되었다고 하겠지만, 못내 찝찝하다. 정말로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기 죽음과 치욕과 슬픔과 절망의 나날 속에 잠겨 인생의 수십 년을 보냈는데 그들이 속절없이 보내버린 세월과 가슴속 깊이 새긴 상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치부해도 괜찮은 건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깊고 뼈저린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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