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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터 그리고 48시간 ㅣ 낮은산 키큰나무 17
유은실 지음 / 낮은산 / 2018년 9월
평점 :
작가 자신의 투병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그레이브스병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발병 원인과 특이한 증상, 그리고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내 몸의 방어체계가 내 몸의 기관을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기에 발병한다는, 참으로 어이없어 웃고픈데 당사자로서는 괴로울 뿐이니 난감하다.
작가는 여고생 정음이를 화자로 내세워 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가족 간 관계와 진실한 우정 등을 곱씹는다. 전체적 어조는 슬프고 가라앉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가운데 유머러스한 맛을 풍기며 독자의 심경을 덜 무겁게 하고 있다.
표제의 ‘2미터’와 ‘48시간’은 화자가 방사성 요오드를 복용한 후 타인에게 방사능이 피폭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하는 공간과 시간의 범위다. 소설의 큰 줄기는 정음이가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받기까지, 그리고 받은 후 안전한 은거 장소로 이동하기까지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싶지만, 정음이에게는 상당한 난제인 게 그의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않기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비좁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처지다.
정음에게 아빠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어렵게 만든, 그리고 책임을 저버리고 도망친 존재에 불과하다. 아빠는 정음네 가족의 주변부를 배회할 뿐 가족의 일원으로 되돌아오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빠의 조언 덕택으로 발병을 인지하게 되었고, 안전한 거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한가득 준비한 무요오드 음식과 반찬은 정음을 향한 아빠의 마음이지만, 정음에게 아빠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이다.
“나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니?”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곧 집에서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집에서 보낸 시간 동안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건. (P.153-154)
방사성 치료는 정음이를 둘러싼 교우 관계의 음영도 낱낱이 드러낸다. 친구로 우정을 맹세했던 H와 S는 정작 피폭을 두려워하여 병원에 함께 가는 걸 회피한다. 홀로 병원에서 고군분투하던 정음이의 눈에 비친 것은 학급의 짝인 인애다. 그는 단지 짝 이상의 관계는 아님에도, 정음이가 홀로 치료를 받게 됨을 걱정하여 보충수업도 빼먹고 찾아온 것이다. 정음이는 처음에 자신의 현실이 부끄러워한다.
나는 가만히 김인애를 보았다. 김인애도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치는 게 불편했다. 다 들켜 버렸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이렇게 있는 걸. 목욕탕에서 발가벗은 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부끄러웠다. (P.88-89)
인애가 보여준 새로운 우정의 행동과 특히 컵라면을 얻어먹기 위한 계획, 즉 놀랍고 대단하고 치밀하고 방대한 모습은 서서히 정음이 마음을 열고 진실한 우정을 받아들이게끔 해준다. 그리고 정음은 다소간의 행복을 느낀다.
나는 조금 행복했다. 깨끗하게 낫는 날은 오지 않더라도, 인애와 함께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는 날은 꼭 올 거 같아서. (P.155)
여기서 우리는 정음이와 아빠의 관계, 정음이와 H와 S의 관계가 정리될 것으로 섣부르게 예상해서는 안 된다. 정음이는 주름 가득하게 늙어 가고 있는 아빠 얼굴을 코앞에서 바라보았으며, 2미터 밖으로 물러나 버렸지만 여전히 옅은 우정이나마 이어나갈 것이다. 인간관계란 게 칼로 무 베듯 딱 잘라질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병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때로는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지만, 사람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던 사람이 중병을 선고받은 이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 이야기를 간혹 접하게 된다. 정음이도 좋건 싫건 간에 그레이브스병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다. 가장 먼저 갖게 된 것은 두려움이다.
엄마가 나와 내 병을 함께 품어 주는 느낌이었다. 따뜻했다. 그리고 불안했다. 나라는 존재 안에 병이 스며들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까 봐. 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레이브스 환자 역할’이 내 인생에서 잠깐 맡은 배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P.40)
사람들은 환자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일상적 기대의 수준을 대폭 하향하거나 아예 기대를 품지 않는다. 환자의 무기력증은 병세 자체에도 원인이 있지만, 정음이의 고백처럼 질병에 책임을 전가하는 무의식적 타성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골치 아픈 개인사와 세상사가 질병 하나로 장막 뒤로 감춰져 버린다.
지난 4년, 나는 병 때문에 아주 괴로웠지만 그만큼 병을 의지했다. [......] 성적, 친구 관계, 감정의 기복, 대학 입시, 늘어나는 체중...... 많은 문제를 그레이브스 씨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러고는 그레이브스 씨가 드리워 주는 그늘에 숨어 버리곤 했다. (P.97-98)
환자의 심정은 본인이 환자가 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환자와 환자의 간병인의 어려움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또한 전에는 무심하게 지나치고 무심하게 여겼던 타인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 씀씀이가 더는 대수롭지 않게 다가온다. 아파도 잘 웃어야 한다는 J의 어설픈 충고,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
“내 새끼, 아픈 몸으로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아무도 모른다. 아파 보기 전에는 몰라.”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멍해졌다. 엉덩이뼈가 부서진 채 누워서, 6인실의 소음을 견디며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 그 할머니가 단단히 잠겼던 빗장을 열고 내 마음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P.144)
이 작품은 좁게 보자면 그레이브스병에 걸린 여고생의 자잘한 신상과 주변 상황을 담고 있는 소품이지만,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면 질병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대해 인식의 재조명을 하는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