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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ㅣ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놀라운 작품을 만났다. 초반부엔 다소 산만해서 시큰둥하게 책장을 넘기었는데, 마지막에 가까울수록 정교하게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꼬리표를 떼고도 일반독자에게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스탠리는 못된 아이가 아니었다. 스탠리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스탠리는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이게 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탓이다! (P.16)
전체적으로 보면 스탠리 옐내츠라는 아이가 누명을 쓰고 소위 못된 아이들이 가는 악덕 캠프에서 고초를 겪는 내용이다. 여기서 그는 제로라는 아이를 친구로 만나게 되고 절체절명의 순간 누명이 풀려 캠프에서 나오게 된다는. 뚱보에 왕따였던 스탠리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데 초점을 맞추면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그가 제로를 구하려고 나서기까지 심적 갈등은 절정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스탠리의 마음을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스탠리의 마음을 정말 괴롭히는 것, 진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 늦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P.206)
물론 단지 성장소설로 간주하기에는 작가가 포함하는 사회적, 문학적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먼저 현재적 시점에서 초록호수 캠프의 무법적, 비윤리적 운영이 두드러진다. 사회적 문제아를 감옥 대신 보내서 구덩이를 파는 육체적 고행으로 교정을 한다는 취지부터가 당황스럽다. 캠프가 위치한 지역, 장소, 시설 및 운영 방식은 담장 없는 감옥 또는 수용소와 유사하다.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소장과 강압적인 미스터 선생님의 비민주적 태도는 처음부터 명확하여 새삼스러울 게 없으나 올바른 인성의 인물로 판단한 펜댄스키 선생님마저도 같은 무리임에 독자는 놀라고 실망하게 된다.
“제로가 스트레스를 받잖아. 너야 좋은 뜻으로 그런 일을 했겠지만, 현실을 봐야지. 제로는 읽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멍청해. 그래서 피가 끓어오르는 거야. 뙤약볕 때문이 아니라.”
[......]
“자, 제로, 받아라. 이게 너의 평생 특기 아니냐?”
펜댄스키 선생님이 제로에게 삽을 건넸다. (P.197)
그가 제로의 역량에 대해 비웃고 무시하는 위 대목을 보면 제로가 그의 얼굴에 삽을 휘두른 까닭에 의아해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는 인종 문제도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답게 인종 간 갈등이 항상 잠재되어 있음도 느낄 수 있다. 이들 측면에서 이 작품은 사회고발 소설이다.
머나먼 타지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스탠리, 그가 겪는 수용소 생활, 그리고 제로와 함께 사막이 되어버린 호수를 가로질러 엄지손가락 산에 이르는 여정. 다시 캠프로 돌아가서 구덩이를 파다가 소장 일행에게 잡히는 사건들은 흥미진진한 모험의 연속이다. 스탠리와 제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년모험 소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은 주인공의 승리이자 악인의 패배라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두 가족의 행복한 결말.
이 작품이 성장소설, 사회고발소설, 그리고 모험소설의 범주를 초월하는 깊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스탠리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초록호수 마을에서 전개된 슬픈 사랑의 전설이다. 우리는 고조할아버지와 마담 제로니에 얽힌 일화를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다. 케이트 바로우와 양파 장수 간 인종과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이 작품 속 당대 및 후손들에게 드리운 영향 및 저주스러운 결과를 보면 오히려 신화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정도다. 정말 신화인가 아니면 희귀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전자에 살짝 기울어 있는 모양새다.
이 모든 것이 1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 이후로 초록호수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보라. 과연 누가 신의 벌을 받았는가? (P.164)
스탠리 식구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언제나 고조할아버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집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다. 이 소설을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의 책임 전가는 마땅하다. 우둔한 독자를 위해 작가가 친절한 서비스 정신으로 덧붙인 아래 문장을 보면 더욱 명확할 테니.
독자 여러분이 흥미를 느낄 만한 사실이 하나 있다. 스탠리의 아버지가 발 냄새 없애는 약을 발명한 것은 엘리아 옐내츠의 고손자가 마담 제로니의 고손자를 업고 산으로 간 바로 다음날이었다. (P.322)
사실 우리는 잘된 일은 자신에게, 잘못된 일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습성을 지닌다. 실패는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기에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자신을 교정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버리는 꼴이 된다. 다른 맥락이지만 펜댄스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말했듯이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자기 자신이므로.
마지막으로 의아한 대목 하나. 스탠리가 제로를 들쳐업고 엄지손가락 산을 힘들게 올라갈 때 떨어뜨렸던 삽과 자루가 나중에 멀리 산 아래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걸 찾게 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언급은 이후에 따로 없지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