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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불멸의 편지
루드비히 판 베토벤 지음, 김주영 옮김 / 예담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베토벤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거치지 않은 베토벤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다. 다행하게도 베토벤은 난청의 덕분으로 많은 편지와 메모를 남겼으며, 이 책에 수록된 것은 선별한 편지 모음집이다. 누구에게나 있어 개인적인 영역은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베토벤이 후대 독자를 의식하여 편지를 쓰지 않았으니만치 여기에는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보다는 꾸미지 않은 인간 베토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오, 베겔러! 어떠한 일도 어떠한 폭풍우도 그 단단하고 영원한 주춧돌, 우리의 우정, 용서, 쓰러져가는 우정의 부활을 흔들지는 못하리라. 오, 신이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자네에게 다가가 그 품에 나를 던지며 간청하고 싶다네. (P.31, 베겔러에게)
평생의 친구였던 베겔러와 엘레오노레에게 보낸 편지는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그의 솔직한 심정과 고민, 부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너무 가깝기에 빚어진 오해와 행동에 대한 사죄와 우정을 향한 열렬한 간구도. 특히 베겔러에게 보낸 여러 편지에서 난청으로 생긴 괴로움과 답답함을 하소연하면서 절대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베겔러의 우정에 필적할 만큼 베토벤이 그에게 충실했는지는 의문스럽다. 베토벤도 계면쩍었던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그럴 가치가 없는 인간”(P.127)이라고 자세를 낮춘다. 슈테판 브로이닝과 다툰 후 그를 맹비난하는 적나라한 면모도 볼 수 있다.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와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수록하였다. 사업상의 목적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많은 편지는 여인을 수신자로 하고 있다. 엘레오노레, 요제피네, 테레제, 베티나 브렌타노, 에르되디 백작부인, 불멸의 연인 등. 베토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여러 여인과 교제하고 청혼하였지만 거절당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마음을 편하게 갖고, 나를 사랑해주시오. 오늘도, 내일도, 그대, 그대, 그대를 향한 눈물겨운 동경, 내 생명, 내 모든 것이여, 안녕. 오 제발 나를 계속 사랑해줘요. 내 진심을 잊지 말아요. (P.62, 불멸의 연인에게)
당신의 사랑을 얻게 되는 것, 오, 내가 얼마나 그것을 열망하는지. 내 능력은 다시 커질 거요. 나는 확신하오. 당신을 얻을 때까지 당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훌륭하게 되어서 보여주겠소. 오, 당신의 사랑으로 내 행복이 이루어지기를... (P.92, 요제피네에게)
편지의 내용을 읽다 보면 베토벤이 너무 치근대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는 상대 여인에게 흠뻑 빠졌다가 얼마 후 다른 여성에게 다시금 애정 고백을 한다. 노총각의 처지로서는 마음이 한시바삐 급하였을 테지만 여성 처지에서는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그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 중에는 단순히 신분상의 차이 외에 다른 요인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부녀를 유혹하는 것처럼 오해받아 사과와 해명에 급급한 편지(P.108, 마리와 비고트에게)도 남긴다.
베토벤의 후반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조카에 대한 양육권 분쟁이다. 그가 제수씨와 법정 소송을 불사하면서까지 조카에 집착한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죽은 동생 대신의 후견인에 만족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는 카를을 단순히 조카가 아닌 자신의 아들로 간주하였다. 그는 모자 관계를 끊기 위해서 제수씨에 대한 모욕적인, 즉 그녀가 돈에 몸을 판다고 하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인생 중 가장 커다란 오점이리라. 여기에서도 그런 주장을 담은 편지를 소개한다.
내 동생의 죽음으로 나는 여러 가지 아주 힘든 일을 겪고 있어. 어머니로서 자격이 없는 여자의 손에서 그 죄 없는 어린아이를 지킨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네. (P.177, 리스에게)
오, 세상에, 정말 끔찍한 일이오. 그런 여자에게 단 한순간일지라도 우리의 둘도 없는 보석을 맡길 수가 있겠소? 어림도 없지요. (P.183, 지아나타지오 델 리오에게)
출판사와 악보출판 관련 편지도 여러 통 담고 있는데, 음악가도 생활을 위해서는 비즈니스에 관여할 수밖에 없음과, 그가 제법 능숙하게 이를 조율하고 있음도 보게 된다. <장엄미사> 후원을 받기 위해 괴테와 케루비니에게 각각 바이마르 대공과 프랑스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 내용도 확인할 수 있는데, 수년 전 괴테와 원만하지 않게 헤어진 후 뜬금없이 편지를 보내는 베토벤이나 이를 외면하고 답장하지 않는 괴테나 다른 의미에서 매우 인간적이다. 베토벤으로서는 오로지 숭고한 예술에만 몰입하기를 원하겠지만, 대지에 두 다리로 서 있는 존재로서 생활의 요소를 외면할 수는 없는 법. 특히 만년에 들어 생활고를 호소하는 그의 절실함이 여실하다.
오래 전부터 작품을 쓰지 못했으니, 말하기 민망하게도 생활필수품을 충족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네. 자네는 런던에서 교유관계도 넓고 필하모니협회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니, 협회가 전에 한 제안을 다시 한 번 고려하고 실행에 옮기게끔 최선을 다해주게. (P.242, 모셸레스에게)
난청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근근이 버텨내던 그가 좀만 더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많은 그의 명곡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그가 걸작을 쏟아내던 때였으므로 매우 아쉽다. 그도 아직은 창작욕과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음을 편지에서 알 수 있다.
아폴로와 뮤즈는 나를 아직은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을 듯하오.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 들려줘야 할 것이 많다오. 엘리시움으로 가기 전에 내 영혼이 나를 일깨우며 완성을 재촉하는 일을 끝내야 하오. 여태까지 한 일은 내게는 음표 몇 개를 긁적인 것밖에 되지 않아요. (P.219, 출판사에)
이제 대작을 몇 개 더 세상에 내놓고 나면, 늙은 어린이가 되어 선량한 사람들 틈에서 살다가 지상의 볼일을 마쳐야지. (P.235, 베겔러에게)
예술과 예술가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양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베토벤의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더 깊고 풍부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