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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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을 때는 못 느꼈던 절절한 감정을 가지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의 경험이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남녀 간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공감하기엔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나 보다. 그들을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무정한 운명의 의지도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두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역시나 양 집안의 근본적인 적대감이다. 단지 상대가 몬터규 가문이기에, 캐풀렛 가문이기에 미워하고 칼을 겨누는 척박한 환경에서 싹 튼 사랑의 가치를 로렌스 수사는 바로 알아차린다. 이들의 결합이 공인받는다면 베로나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근심이 일거에 사라질 테니. 하지만 운명의 힘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머큐쇼의 죽음과 줄리엣의 가짜 죽음으로 촉발된 운명의 엇갈림은 그들에게 지상의 행복 대신 천상의 자리를 선사한다. 이 숨 가쁘게 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은 로렌스 수사의 말처럼 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이리라.

 

(로렌스 수사) 우리가 거역 못할 커다란 힘 때문에 / 우리 뜻이 좌절됐다. 자 여길 떠나자. (5막 제3, P.150)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발코니 장면과 첫날 밤 대목은 사랑에 눈뜬 젊은 연인의 거짓 없고 열렬한 사랑의 언어가 가슴에 저며 온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지 사랑뿐인데. 두 사람의 이름 자체는 허울에 불과한데. 오직 그들 자신이 진정한 본질인 것을.

 

(줄리엣)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완벽성을 / 유지할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 나를 다 가지세요. (2막 제2, P.53)

 

사랑했기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죽어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었던 두 사람. 비극임에도 더없이 아름다우며, 슬픔이 북받치는 가운데 평온한 기쁨이 스며드는 양가의 감정.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닫는다면 새삼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작품 속 인물의 행동과 선택에 이러쿵저러쿵 촌평할 수 있다. 덜 성급하고 조금만 이성적 사고를 하였다면. 특히 티볼트와 머큐쇼에 대해서. 머큐쇼는 본인이 싸움을 촉발한 당사자임에도 칼에 찔려 죽어갈 때 양 집안에 여러 차례 저주를 퍼붓는다. 티볼트는 로미오를 향한 맹렬한 적개심으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 캐풀렛 노인조차도 로미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인정하고 자제를 지시했건만. 친구 머큐쇼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로미오로서는 아마도 다른 선택은 온당치 않게 여겼으리라. 어쨌든 이들은 두 사람의 사랑과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몰고 가고 빛나게 하기 위한 조역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극 중에서 억울하게 무덤에 묻히게 되는 파리스마저도.

 

이 작품에서 낮과 밤이 갖는 기능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때를 포함하여 그들의 사랑 고백, 첫날밤 그리고 무덤에서 사랑의 완성, 이 모든 게 밤에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밤은 둘만의 시간, 사랑이 지배하는 때라고 하겠다. 반면 낮은 미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두 가문의 다툼은 낮에 벌어진다. 머큐쇼와 티볼트, 티볼트와 로미오의 결투도 낮에 발생한다. 캐풀렛 노인이 딸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때도 밤이 지난 후다. 이러한 밤의 의미에 대해 작품해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사랑과 이별과 삶과 죽음은 주로 밤에 벌어지는 꿈 같은 생시이고 생시 같은 꿈으로 다가온다. (P.165)

 

이 작품은 매우 진지하고 열렬한 사랑과 그 슬픔을 다루면서도 분위기가 의외로 축 가라앉지 않고 반짝거리는 아름다움과 때로는 경쾌함마저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도처에 삽입한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대목의 효과라고 하겠다. 비극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유머는 독자 또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여 심리적으로 지치게 하는 걸 막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줄리엣의 유모, 머큐쇼, 그리고 하인 피터가 큰 몫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줄리엣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대상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과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올곧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는 태도. 사랑에 지고지순한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미처 열네 살이 안 된 어린 아가씨가 성숙해지고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 것 역시 그들이 이루어낸 사랑의 효과라고 하겠다.

 

(줄리엣) 너그러운 마음으로 또다시 주려고요. / 하지만 가진 것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 아낌없는 내 마음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 사랑 또한 같이 깊어 더 많이 줄수록 / 더 많이 생겨나요. 둘 다 무한하니까. (2막 제2,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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