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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달아 읽다 보니 가슴 한쪽이 묵직하였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금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 희극을 쓸 때 셰익스피어의 심정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절한 사연을 집필 중이었다고 하니. 이 작품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두 쌍을 중심으로 테세우스 공작과 히폴리토 여왕,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사랑이 곁들여진다. 극중극인 ‘피라무스와 디스비’도 사랑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은 사랑의 다채로운 양태를 골고루 탐구하고 있다.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작가의 관심은 먼저 엇갈린 사랑의 바로잡기에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애정사에 있어 양쪽이 모두 진실한 사랑을 품고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 라이샌더와 허미어의 사랑이 그러하다. 두 사람은 가족과 사회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테네를 탈출할 결심마저 품는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강력하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데서 일은 꼬인다.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사례를 보자. 외모 등의 조건에서 헬레나는 허미아에 못지않음에도 드미트리우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한때 헬레나를 향하던 그의 마음은 이제 허미아만을 향한다. 그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자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안간힘 쓰는 헬레나의 노력에서 애처로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헬레나가 이렇게 토로할 것인가!
(헬레나) 아이 참, 드미트리우스! / 당신의 잘못은 여성을 욕보이는 겁니다. / 우리는 남자처럼 사랑 놓고 못 싸워요. / 구애를 받아야지 하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제2막 제1장, P.38)
사랑은 독점을 요구한다. 사랑은 공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애는 커다랄 수밖에 없다. 묘약의 효과로 드미트리우스와 라이샌더가 오히려 자신에게 구애하자 헬레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작당하여 불쌍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며 분개한다. 이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독자는 감성지수를 확인해봐야 하리라. 그것은 우스움을 가장한 극한의 슬픔이다.
사랑의 결실을 이룬 부부간의 애정도 요정의 왕과 여왕의 냉전을 보면 순탄치는 않다. 극 중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의 발단은 결국 오베론이 퍽을 시켜 눈에 바르게 하는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녀가 모두 참된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딸이 자신의 결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으면 죽음을 내릴 것도 불사할 정도로 강경하다.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사랑도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라이샌더도 극 중에서 참사랑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탄식할 정도다.
(오베론)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즙을 바르면 / 눈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제2막 제1장, P.35)
문제는 어렵게 성취한 사랑이 영원하리란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참사랑의 어려움은 변심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데 있으며, 외물에 의하여 사랑의 감정이 영향받을 수 있음이다. 오베론의 사랑의 묘약은 사랑과 미움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약물이지만 외모, 재력, 계급 등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관한 사랑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사랑의 감정과 대상은 가벼이 바뀔 수 있다. 예전 광고에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다.
(라이샌더) 허미아에 만족을? 아뇨. 그녀와 함께 보낸 / 지겨운 순간들을 후회하는 바입니다. / 허미아가 아니라 헬레나를 사랑하오. (제2막 제2장, P.45)
사랑은 맹목적이다. 제삼자의 눈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랑도 당사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감정이 최우선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의 독자는 나귀가 된 바틈을 향한 티타니아의 사랑을 비웃을 것이다. 티타니아 자신도 묘약의 효과가 사라지자 자신의 행위에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 자체는 더없이 순수하였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티타니아) 고상한 인간이, 다시 한 번 노래해요. / 내 귀는 당신의 가락에 쏙 반했고 / 눈 또한 당신의 형상에 사로잡혔으며 / 당신의 아름다운 미덕은 나에게 강제로 / 첫눈에 사랑을 말하고 맹세케 한답니다. (제3막 제1장, P.53)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즐거움과 기쁨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엇갈린 사랑은 모두 제자리를 찾고 세 쌍은 각자의 연인과 결혼에 이른다. 요정의 왕과 여왕은 나란히 손을 잡는다. 장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며 특히 공작을 만족시킨다. 대단원을 마감하는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제5막 제1장의 찬가는 이 작품의 희극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모든 게 잘 되었으니 이걸로 충분한가? 눈 부신 빛 속에 한 가닥 그림자가 서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 자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 이상 상태, 나아가 일종의 열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꿈에서 열병에서 깨어나면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할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베론) 그들이 다음에 깨어나면 이 모든 웃음거리 / 꿈이나 무익한 환영처럼 보일 거고 (제3막 제2장, P.73)
(드미트리우스) 우리가 확실히 / 깨 있긴 한 거야? 난 아직도 우리가 잠자고 / 꿈꾸는 것 같아. (제4막 제1장, P.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