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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맥베스는 비겁한 인물이 아니다. 반란군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제압하는 그에 대한 모든 이들의 평가는 왕의 친척으로서 충성스럽고 장군으로서 용감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예언의 실현으로 자신에게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지만 그는 자신을 포기하거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맥베스) 던시네인 언덕으로 버남 숲이 오기는 했지만 / 대적하는 네놈이 여자 소생 아니긴 하지만 / 난 끝까지 해보겠다. 이 도전의 방패를 / 내 몸 앞에 던진다. 덤벼라, 맥더프. 그리고 / “멈춰.”라고 하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제5막 제8장, P.131)
충신 맥베스를 반역의 길로 이끄는 것은 마녀들의 예언이다. 그들의 예언이 제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맥베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예언이 사실로 확인되자 맥베스의 잠재된 권력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유혹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다. 살짝살짝 건드려서 감질나게 만들어 조금만 더 하면 손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충동에 이성을 놓고 덤벼들게 만드는 것. 도박에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줄거리다. 이처럼 유혹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 그중에서도 권력욕을 다룬 게 <맥베스>다.
(맥베스) 눈앞의 공포보다 / 끔찍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 살인은 아직도 환상에 지나지 않건만 / 그 생각이 내 온몸을 거세게 뒤흔들어 / 심신의 기능이 억측으로 마비되니 / 없음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제1막 제3장, P.26)
마녀는 그에게 ‘왕이 되실 분’이라고 했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지 방법은 언급하지 않는다. 덩컨 왕과 왕자들이 갑작스럽게 전사하거나 병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맥베스는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도 맥베스는 대뜸 살인을 상상한다. 그의 권력욕은 욕망 실현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에게 욕망이란 무조건 당장 실현되어야 하는 성격이며, 즉각적인 권력 쟁취는 곧 피비린내를 뜻한다.
(맥베스 부인) 이 일을 감행코자 했을 때 당신은 남자였고 / 전보다 더 과감해져 훨씬 더 큰 남자가 / 되려고 했어요. 당시엔 시간과 장소가 / 안 맞아도 당신이 맞추려고 했는데 / 저절로 맞춰지니 이젠 그 적절함 자체가 / 당신 기를 꺾는군요. (제1막 제7장, P.39)
옛말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하였다. 외부의 유혹이 솔깃해도 내 마음이 평온하다면 물결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가 유혹에 끌리는 것은 내 마음속 깊이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때마침 유혹이 이 욕망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혹의 주체가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주변의 부추김이 더한다면 어지간한 당사자는 초연하게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맥베스처럼. 그렇기에 독자는 이 모든 비극의 사단이 맥베스 자신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파멸에 한 가닥 안타까움을 품게 되는지 모르겠다.
모든 왕위 찬탈자가 비극을 맞이하지 않는다.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권좌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극 중의 대화 장면을 통해 맥베스가 ‘폭군’이 되었고, 대다수 신하와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맬컴이 아닌 누가 와도 그는 버텨내지 못하였으리라. 맥베스는 권력을 탐했지만, 무엇을 위한 권력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한계다.
(모두)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제1막 제1장, P.14)
(맥베스) 이렇게 더럽고 고운 날은 본 적이 없구려. (제1막 제3장, P.20)
‘더럽고 곱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작가는 이 표현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며 그것을 제때 제 곳에 정확히 사용한다. 인간의 내면은 완전한 순수와 완전한 불순의 중간 어디쯤이다. 이성과 야만, 아름다움과 추함 등 상반되는 요소들이 혼재된 게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네 자신도 맥베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맥베스의 처지에 있을 때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네 삶 자체가 모순과 상충의 연속이다. 이것이 조화와 안정을 이룰지 아니면 불화와 불안한 상태로 돌변할지는 자기 자신과 환경에 좌우된다.
맥베스는 권력의 욕망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허약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잔인과 비열에도 불구하고 그를 저버리거나 매도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과신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에, 맥베스가 그러했듯이.
<햄릿>, <오셀로>와 <맥베스>를 연달아 읽어나가면서 셰익스피어가 원숙기에 쓴 일련의 비극은 인간 본성의 불완전한 내재적 본성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햄릿의 유명한 망설임, 오셀로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 그리고 맥베스의 치명적 욕망. 독자는 탄식하거나 분개할 수는 있지만 달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