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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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다. 워낙 명성이 자자했지만 저작이 방대한 만큼 일단 빠졌다가는 헤어나질 못할 걸 우려하여 그동안 주저하였다. 특정 저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능하면 섭렵하려고 하는 개인적 독서 습관의 부작용이다.

 

각설하고 푸아로는 특이한 유형의 탐정이다. 셜록 홈즈가 지성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푸아로는 전적으로 지성에 의존한다. 이 작품에서도 의자에 기대앉아 추리만으로 진실을 밝혀낸다”(P.266)는 게 농담의 소재가 되었지만 나중에 이것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푸아로도 자신의 특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의사 선생, 보시다시피 난 전문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사람의 심리 분석이지 지문이나 담뱃재 채취가 아니죠. (P.94)

 

이 작품은 푸아로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될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폭설로 고립된 열차 안에서의 살인사건이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고 범인이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열차 승객이 모두 용의자가 된다. 범죄 수법을 보건대 범인은 단독범이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승객 모두는 각자가 치밀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오로지 승객의 진술과 자신의 회색 뇌세포에 의지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인 동시에 푸아로의 능력을 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이번 사건의 경우 재미있는 점은 우리에게는 경찰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린 사람들의 증언이 진짜인지 조사해 볼 수 없습니다.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훨씬 더 흥미롭긴 합니다. 보통의 수사 활동은 전혀 없어요. 오직 추리만 가능하지요. (P.209)

 

작가는 탐정으로서 푸아로의 뛰어난 능력이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님을 보여주는데, 사소한 사항도 놓치지 않으며 일상화된 그의 탁월한 관찰력이다.

 

푸아로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뒤로 기대어 차분하게 식당차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부크의 말대로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열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푸아로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P.41)

 

대개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대중과 독자의 동정을 사기 마련이다. 이 소설의 피해자는 전혀 반대다. 그의 숨겨진 신원이 밝혀지자 푸아로를 비롯한 모든 작중 인물은 오히려 그의 죽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대놓고 기쁨을 표시하는 승객마저 있을 정도로 그는 악랄한 범죄자였던 것이다. 푸아로조차도 자신을 경호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정도로 라쳇은 기분 나쁜 악인의 냄새를 풍길 정도이니. 라쳇에 대한 첫인상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레스토랑에서 그 사람이 날 스쳐 지나갈 때 기묘한 인상을 받았답니다. 마치 야수가, 아주 사나운 동물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P.31)

 

비교적 느슨하게 흘러가던 작품의 전개는 푸아로가 승객 전원과 차례로 면담을 거치면서 후반부에 급격하게 굽이친다. 간과되기 쉬운 미세한 틈을 발견하고 파헤쳐 자그마한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 실마리를 통해 또 다른 허점을 찾아낸다. 이 과정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흐트러져 있던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나가는 대목을 읽다 보면 푸아로의 치밀한 추리와 창의적 추론에 감탄하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듯 그의 지적 매력에 황홀하게 빠져들 정도다. 작가 크리스티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P.33)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우연히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했나 봅니다. (P.34)

 

기실 초반부에서 작가는 중요한 복선을 깔아둔다. 비수기임에도 만석이 된 오리엔트 특급의 일등실. 호텔 지배인도, 철도회사 중역인 부크도, 그리고 차장조차도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정말로 보기 드문 우연이라고 할밖에. 그러나 푸아로의 생각은 다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암스트롱 사건과 관련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연히도 같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꾸민 일이겠지요. (P.328)

 

살인은 분명 범죄다. 살인범은 반드시 체포하여 법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탐정 푸아로의 역할이 그러하다. 그런데 피살자가 범죄자라면? 그것도 만인의 공분을 사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죄를 저지른 경우. 게다가 교묘하게 법의 심판을 피해 유유히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불의인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분명한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독자는 푸아로와 부크, 그리고 의사 콘스탄틴의 선택에 공감한다. 사람과 동떨어진 법은 존재 의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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