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9
제임스 프렐러 지음, 김상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폭력 사안은 국내에서도 오래전부터 대두되었다. 근래는 관리체계가 나름 정착된 탓인지 관련 이슈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학교폭력이 근절되었다고 섣불리 단언하는 건 곤란하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라면 개인적 경험도 있고 보고 들은 이러저러한 사례와 견해가 제법 있기에 말하고자 하면 지리하게 늘어날 수 있으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고 이 책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학교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마지막으로 학교 당국으로 구성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비교적 명확하다. 이 책에서는 그리핀과 할렌백이 해당한다. 외견상 그리핀은 매력 만점의 학생이며, 할렌백은 다른 아이들도 어울리기 싫어할 정도로 비호감의 대상이다. 그리핀 일당의 할렌백 괴롭히기에 다른 아이들이 굳이 나서서 반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다. 물론 그것으로 학교폭력의 정당성이 옹호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리핀의 외모와 언행을 기술하는 대목만을 보자면 그리핀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학생이다. 그의 외면과 내면의 극적인 대조는 그래서 더욱 두드러진다.

 

녀석의 미소는 깨끗하고 순수한 햇살 같았고, 긴 속눈썹은 가볍게 깜빡였으며, 볼은 투명한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녀석은 완벽한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P.146)

 

그리핀의 마음 한가운데는 큰 구멍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은 없었다. 그리핀은 그게 뭐든 간에 별 느낌이 없는 애였다. 차갑고 딱딱한 벽돌 같은 애였다. (P.199)

 

여기서 작가의 관심은 지켜보는 아이들, 즉 방관자에게 주어진다. 방관자는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굳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언뜻 보면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방관자의 존재 자체가 이미 가해자에게 승리감을, 피해자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나쁜 짓을 해도 누구도 말리지 않고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 인간관계는 뒤틀리기 마련이며,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악영향을 받는다. 방관자는 이처럼 폭력을 묵인하는 동시에 잠재적 피해자가 될 우려가 있다. 작가는 방관자의 위선적 태도를 한 꺼풀 벗기기 위해 밀그램의 실험을 소개하고, 마틴 루서 킹의 격언을 인용한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에릭은 생각했다. 그 못된 장난에 참여한 적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할렌백을 괴롭히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도 없고, 그 게임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에릭은 한 걸음 물러난 채, 그저 못 본 척했다. 하지만 사실 에릭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다른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점차 그 장난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건 청바지를 입은 악동들의 테러였다. (P.101)

 

그리고 방관자는 언제든 자신이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는 에릭이 그리핀의 무리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그리핀은 할렌백에서 에릭으로 괴롭힘의 대상을 변경한다. 이제 주변에 에릭을 도와주는 사람은 같은 처지의 메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방관자 대다수는 자신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예감하지 못하거나 그 위험성을 염두에 두기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되는 행동 방식을 선택한다.

 

가해자 그리핀의 왜곡된 성격, 그를 배태한 불완전한 가족관계는 이 작품에서 살짝 드러나지만 그것이 학교폭력을 변호할 수 없다. 가정환경을 탓하자면 에릭도 그리핀에 못지않게 열악한 처지이므로. 결국 당사자의 수용 방식에 따른 것이다. 피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할렌백과 에릭은 상반되는 대응 태도를 보인다. 할렌백은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가해자가 되려고 한다. 폭력의 전형적인 대물림 구조이지만 폭력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피해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에릭은 폭력에 저항한다. 물리적 폭력도 에릭의 정신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리핀이 에릭을 놓아두는 것은 그를 괴롭혀봤자 자신에게 별달리 득이 될 게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위는 학교 당국이 가지고 있다. 학교 당국은 학교폭력의 인정과 처리에 의외로 소극적이다. 이 책에서도 그리핀은 여전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학교에 다니고 있다. 칼을 소지했다는 근거 없는 제보만으로 에릭의 사물함을 이 잡듯이 뒤지는 교사들이 어째서 에릭과 할엔 백의 폭행당한 흔적에는 둔감한지. 근거 없는 제보자에 대해 어떤 조처를 했는지 여기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물론 이해는 된다. 학교폭력의 발생은 학교 관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관리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여차하면 향후 교사의 경력 및 승진에서도 감점 요소가 되므로 누구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학교폭력에 대한 학교 당국의 외면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에게 중요한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핀 코넬리의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에릭이 뭔가 행동에 옮기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P.187)

 

학교폭력은 방치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시간의 힘은 가해자의 공격성을 강화하고 피해자의 억압과 분노를 심화시킨다. 방관자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학교 당국은 잠재적 핵폭탄을 키우고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핀도, 에릭도, 할렌백도 여전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화로운 중학교의 외양이다. 에릭 자신은 학교폭력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평범한 학생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개인 차원에서 해결이지만 구조 차원에서는 달라진 바 없다. 그것은 학교폭력은 근원적 해결 없이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작가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