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니메이션 영화를 먼저 보았고, 후에 원작이 널리 알려진 동화임을 알게 되었다. 대개 동화는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결국은 갈등이 해결되고 주인공이 행복하게 되는 게 통상적인데 이 작품은 동화치고는 독특한 요소가 여럿 있다.

 

일단 주인공이 죽게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비극이다. 비극적 동화는 동화의 본질에 배치된다. 세상은 도처에 비극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굳이 동화에까지 반영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암탉 잎싹의 최후 장면을 복기해 본다.

 

,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 배를 채워라.

잎싹은 눈을 감았다. 순간 목이 콱 조였다. 무척 아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뼈마디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를 물었구나, 드디어... (P.190-191)

 

잎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족제비에게 내던진다. 잎싹에게는 두가지 소망이 있었다. 하나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인데, 초록머리를 무사히 청년 청둥오리로 키웠으니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신도 날고 싶은 소망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잎싹은 나는 능력을 상실한 양계장 닭이므로. 하나는 이루었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므로 잎싹은 삶의 이유가 남아 있지 않다.

 

그랬다. 모든 것이 아래에 있었다. 저수지와 눈보라 속의 들판, 그리고 족제비가 보였다. 비쩍 말라서 축 늘어진 암탉을 물고 사냥꾼 족제비가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P.191)

 

작품의 가장 마지막 대목이다. 잎싹은 죽음을 통해 생전에 불가능했던 마지막 소망을 이루었다. 즉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잎싹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동물, 아니 인간이 있을까?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지만 결코 슬프지 아니한 죽음, 오히려 행복한 죽음이라면 이를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잎싹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청둥오리 나그네 부부를 잡아먹고 마침내 잎싹마저 새끼의 먹잇감으로 물고 가는 힘겹게 걸어가는 족제비. 작품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던 냉혹하고 무자비한 족제비. 독자라면 누구나 잎싹과 나그네를 동정하고 악역 족제비를 미워하리라.

 

잎싹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아기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족제비도 어쩔 수 없는 어미라는 것을 알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지는 들판. 그 속을 뚫고 어미가 달려가고 있었다. 눈도 못 뜬 새끼들 때문에 곧 돌아와야 하는, 바람처럼 재빠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어미. 고달픈 애꾸눈 사냥꾼. (P.184)

 

잎싹은 깨닫는다. 족제비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본성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행위임을. 자신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자 하는 본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살아가는 양태가 다를 뿐. 어미 족제비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자연이 정해 놓은 생명의 법칙이다.

 

양계장 암탉으로 살아가던 잎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마당에 나오면서 원하던 자유를 누리지만 안전을 위협받는다. 자유는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자유는 주체의 자발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잎싹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먹이를 구해야 하고 천적의 위험도 극복해야 한다.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아닌 날씨도 대비해야 한다. 차라리 양계장 안에 있었던 시절이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여기서 자유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물질적 안락과 무사편안을 뛰어넘는 정신적, 도덕적 가치로서의 자유의 본질.

 

나한테는 소망이 있었어.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암탉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람인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P.23)

 

잎싹이 마당을 나온 이유는 알만 낳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의 알을 낳고 키우고자 하는 소망에서다. 모성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알을 낳지 못하는 잎싹이 청둥오리의 알을 자기 알이라 믿고 정성껏 품는 장면, 그리고 아기 오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초록머리와 잎싹이 종이 다르다고 해서 모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매정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흔히 말하듯 낳기만 해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잘 키워줘야 부모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잎싹은 부모의 자격이 충분하다. 여기서 사랑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잎싹과 나그네는 처지가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했다. 초록머리와 잎싹은 서로가 같을 수 없음을 알지만 여전히 부모 자식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잎싹은 기쁜 마음으로 초록머리를 떠나보냈다. 심지어 잎싹은 어미 족제비조차 이해하고 자신의 몸을 제공했다. 이 모든 걸 결국 사랑이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걸까?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P.1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