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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신은 야생 멧돼지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ㅣ 시튼의 동물 이야기 8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평점 :
순수한 야생의 세계는 이제 없다. 야생 동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 설정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없다. 인간과 더불어 살거나 주변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인간을 피해 살거나. 제아무리 인간과 접촉하지 않으려 해도 인간은 집요하게 야생 동물에게 접근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 친구들도 어떤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지에 따라 그들의 삶이 크게 좌우됨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말은 무가치하다.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 사람이 타려고 하면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는 콜리베이 같은 말은 제아무리 외모가 훤칠하더라도 쓸모가 없고, 쓸모없는 말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 말의 관점에서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행위다. 노예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을 겪더라도 고귀한 본성을 지킬 것인가. 콜리베이는 후자를 선택했다. 화자는 콜리베이가 자유를 되찾은 것에 기뻐하지만, 이 드문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곤란하다. 콜리베이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미국 너구리 웨이앗차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미국 너구리가 살아가는 평화로운 정경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어 독자가 흐뭇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반면 후반부는 인간에게 붙잡힌 웨이앗차가 우여곡절 끌에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 기술되어 있다. 너구리가 피곳의 농장에서 즐거운 시절을 보낸 것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였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동물을 대하는 법이다, 웨이앗차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캐나다기러기 가족의 슬픈 가족사는 어떠한가? 장거리 이동을 하는 철새인 기러기가 자식들과 함께 날지 못해 호수에 주저앉았을 때 그들의 심정을 인간은 결코 알지 못한다. 어쩌다가 어미 기러기가 날 수 있게 되어 자식들과 함께 떠나가 버리고 아비 기러기가 홀로 호수에 버려졌을 때 우리 역시 그 처절한 슬픔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기러기 부부의 충실한 사랑으로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기쁨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비극의 단초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한 인간의 몰지각한 개인적 욕망이라는 사실을. 비록 그가 후에 기러기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나는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득한 옛날 쐐기 대형으로 하늘을 날던 그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갈망했다. 나는 다른 호수에서 목이 검은색인 기러기 한 쌍을 잡아와서 날개의 칼깃을 잘랐다. 방랑의 계절이 돌아와도 날아갈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P.268-269)
원숭이 지니의 일생은 인간과 악연의 연속이다. 고향에서 잡혀 머나먼 타지로 운반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행위로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 비록 존과의 우정이 그에게 한 줄기 따스한 위안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니가 사로잡히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었을 때와 비교 불가능이다. 지니를 창살 넘어 찌른 잔인한 인간이 어디 그 혼자뿐이겠는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야생 동물에게는 대부분 재앙적 영향을 미치게 됨을 동물 이야기를 통해 많이 보았다. 그런 인간에게 한결같은 충성과 애정을 보이는 개라는 동물은 매우 이색적이기에 다행하기조차 하다. 개마저 없었다면 인간은 어떤 동물을 동반하고 의지할 수 있었을까.
멍청이 빌리 이야기는 인간과 개의 숱한 미담에 하나를 추가해 준다. 무적의 터크에 대한 사냥꾼의 기대감도 우수한 혈통과 당당한 외모, 까칠한 성격 등을 보면 당연하다. 반면 빌리를 보자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겉으로 비치는 번지르르함에 현혹되어 진정한 내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옅은 안목. 주인의 목숨을 구한 빌리를 향한 칭찬과 대우는 마땅하지만, 부끄럽고 비열한 행동을 보인 터크의 최후를 보자면 비단 동물에 국한되지 않는 점에서 뒷맛을 남긴다.
이 책의 대표적 이야기는 단연 ‘구두 신은 야생 멧돼지’와 ‘박쥐 아탈라파의 대장정’이다. 전자는 멧돼지가 인간과 감정적 교류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장면이 따뜻하며 해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구두약을 칠해 달라고 앞발을 내밀고 등을 긁어달라고 재촉하는 멧돼지, 마치 강아지처럼 리젯을 졸졸 따라다니는 거푸미를 보면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기본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원숭이 지니를 대하는 존처럼.
사실 그는 자신의 말을 동물들이 알아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동물들도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P.289)
거푸미 이야기의 압권은 거푸미 부부와 불구대천의 원수 늙은 곰의 사생결단 대결이다. 화자를 통해 수컷 멧돼지의 무시무시함과 위력을 전해 들었지만 어쨌든 거대한 곰은 포식자다. 일반적 경우라면 싸움을 회피하고 등을 돌려야 마땅하지만 거푸미는 그렇지 않다. 가족에 대한 본능적 애정과 유대감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더해 준 것이다.
시튼 동물기 중에 박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지껏 최초의 사례가 아탈라파 이야기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박쥐의 생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박쥐가 엄청난 비행 선수라는 것, 번식기를 제외하면 암수가 따로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는 것, 그리고 철에 맞추어 대장정을 한다는 등. 박쥐가 해충을 많이 잡아먹어 인간에게 극히 이로운 동물이라는 화자의 열변을 보건대 흡혈귀와 어둠 속 두려움의 존재로 낙인찍힌 박쥐의 이미지는 잊어도 좋다. 눈을 가려도 잘 날아다닐 수 있는 박쥐의 능력은 요즘은 상식이지만 시튼 당대에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실이었던 듯하다. 아탈라파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풍요로운 남국에 다다른 것을 축하한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그들의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순수한 야생 동물의 세계는 대부분 사라졌다. 현존하는 일부 지역들도 인간의 불온한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거나 강제적으로 보호구역을 설정하였기에 살아남아 있을 따름이다. 웨이앗차가 살아가는 숲만 해도 인간에게 별 경제적 가치가 없기에 겨우 유지될 수 있다. 그 한 줌의 숲은 “농부들의 말마따나 쓸모없는 나무만이 남은 것”(P.153)이기에.
언제까지 마냥 우연과 행운에 기댈 수 없는 법이다. 존이 지니에 대했던 것처럼, 시튼이 서문에서 적었듯이 동물들도 “작지만 굳세고 지혜로운 영혼”(P.6)이 있음을 인식하고 “무시하지 않고 좀더 따뜻하게 대해”(P.6) 준다면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