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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ㅣ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평점 :
앞서 읽은 다른 북유럽 신화 관련서와 비교할 때 이 책의 특징은 해설서와 이야기책의 중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50여 면의 서론을 두고 북유럽 신화 체계의 전반적 개요-우주론, 주요 신들 등-를 충분히 다루어 신화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어차피 북유럽 신화 원전에 충실하게 그대로 번역하면 대다수의 독자는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신화의 시간적, 내용적 흐름을 재구성하고 불친절하거나 불명료한 대목은 글쓴이의 상상력이 메꾸어야 한다.
부제가 의미하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순전히 신들이 등장하는 내용만 다루고 있다. 통상 반지 이야기로 불리는 뵐숭 가문과 니플룽 가문의 비극은 소개하지 않는다.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은 신들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할뿐더러 덕분에 세계 창조에서 시작하여 라그나뢰크로 막을 내리는 일관된 신화 체계가 주는 전언은 혼란스럽지 않고 명료하다.
이 책의 구성 자체는 원전에 충실하다고 하겠다. 보다 대중적인 개설서는 흥미로운 사건 중심의 이야기만 편집하여 서사 중심의 신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이 책은 비가, 노래, 연가 등의 제목이 달린 원전의 내용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개설서를 읽은 독자로서도 생소한 내용과 장면에 자주 맞부닥친다. 리그의 노래, 그림니르의 비가, 바프트루드니르의 비가, 힌들라의 시, 하르바르드의 노래, 로드파프니르의 비가, 알비스의 비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신화의 중심적 내용이 이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신화의 폭과 깊이를 풍부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몇 개의 내용만 간단히 들여다본다.
‘힌들라의 시’에서 프레이야와 수퇘지로 변신한 그의 애인 오타르의 존재가 드러난다. 프레이야의 품행은 목걸이를 얻기 위한 네 난쟁이와 동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방정하지 못하다. 힌들라는 이를 비난한다.
‘그림니르의 비가’에서 그림니르[오딘]가 자신에게 온정을 베푼 가이로트의 아들 아그나르에게 세계와 신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대목은 흥미롭다. ‘오딘과 빌링의 딸’은 빌링의 딸에게 실망한 오딘의 여성 비난의 글로 해석되는데, 고금이 유사하여 미소를 짓게끔 한다. ‘로드파프니르의 비가’는 오딘이 인간에게 남겨 준 교훈 내지 훈계의 장이라고 하겠다.
이 책의 아쉬운 점도 언급하자면 간혹 편집상 교열이 미흡하다는 인상이다. 그리고 영어권 책이므로 번역 자체도 영어식으로 이루어져 일반적 표기와 다소 차이가 있다. 라그나뢰크 대신 라그나로크, 발드르 또는 발데르 대신 발더, 회니르 대신 호니르가 그러하다. 이건 독자가 적응할 수밖에 없다.
반복해서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니 새삼 간과했던 장면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신화 초반부에서 로키는 장난꾸러기의 신이었다. 그런 그가 신들에 적대하여 라그나로크의 주역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거인족인 그가 자신의 근본과 숙명을 인식했을까, 신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행한 처사에 분개하였을까. 어쨌든 발더의 살해를 유발하고 신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로키는 이미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 실행의 첫 단추를 꿰었다.
다시는 이런 잔치를 열지 못할 거야. 날름거리는 불꽃이 이 궁전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것이거든. 자네 몸뚱이도 불꽃 속으로 사라질 거고 말이야 (P.379)
라그나로크에 대해 추가하자면, 오딘과 바프트루드니르는 라그나로크와 신들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라그나로크는 부지불식간에 닥치지 않았다. 오딘은 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발할라에 모은 전사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티르와 히미르의 관계도 다시 정리해본다. 히미르는 티르의 친부인가 의부인가? 다른 곳에서는 티르를 오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일단 논외로 하자. 티르가 히미르의 친자라고 하면, 티르는 신족이 아닌 거인족이라는 셈이다. 로키와 마찬가지로. 히미르가 티르의 친부라면, 토르가 히미르를 죽이는데 말리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티르는 천륜을 저버린 셈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히미르는 티르의 의부라고 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라그나로크에서 주르트와 대결하는 프레이르는 보검이 없어 역부족으로 죽음을 맞는다. 프레이르는 게르드와 결혼하기 위해 스키르니르에게 대가로 그의 보검을 주었다. 여기서 그의 비극이 배태되었다. 자신의 청혼을 타인에게 의탁한 소극성. 결혼 성사를 위해 설득이 아닌 저주의 주문을 통한 위협과 겁박의 사용. 프레이르와 게르드의 결혼 생활의 행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봐도 온당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신은 정의롭고 거인은 불의하다는 이분법적 견해는 올바르지 않다. 앞서 프레이야의 행실을 보았듯이 오욕칠정의 면에서 신들도 차라리 인간적이다. 적수 바프트루드니르를 꺾기 위한 오딘의 해법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오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바프트루드니르의 차분한 태도가 오히려 감동적이다. 자신의 딸의 구혼자인 난쟁이 알비스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도 토르답지 않게 비열하다. 미드가르드를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간 안드바리의 저주받은 반지 또한 발단은 신들의 무자비한 강탈에서 비롯하였다.
라그나로크는 신화 세계의 멸망이다. 신들과 거인들이 최후를 맞이하고 몇몇 신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세계의 중심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말인 동시에 출발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땅 위에도 새로운 생명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종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