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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산양, 크래그 -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ㅣ 시튼의 동물 이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음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사냥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된 동기, 내 가장 큰 소망은 해롭지 않은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는 일을 멈추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P.10)
서문에서 시튼이 스스로 밝힌 의견이다. 종종 사람들은 착각한다. 야생 동물에 동정적 시선을 보내는 시튼을 동물 한 마리도 죽인 적 없는 순수한 동물보호주의자로. 그가 꿈꾸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자연 속에 공존하는 삶이다. 그는 ‘지나친’ 동물사냥이나 학대에 반대한다.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이유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 8편 중 ‘위대한 산양, 크래그’, ‘곰 조니’, 그리고 ‘포로가 된 코요테’의 세 편이 내용과 분량 면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위대한 산양, 크래그’에서 사냥에 반대하지 않는 시튼조차도 크래그에 대한 스코티의 집착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늑대처럼 가축에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쇠오리나 들꿩처럼 식육용도 아니다. 단지 멋진 뿔을 박제하여 집안에 장식하고 싶은 과시욕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사냥개를 잃어버린 동료마저도 크래그의 고고한 품격과 당당한 자태에 감탄하여 사냥을 그만두었지만 스코티는 결코 포기할 줄 모른다. 장장 12주에 걸친 크래그와 스코티의 쫓고 쫓기는 추적 장면은 인간의 맹목적이고 광적인 탐욕의 극한의 정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크래그에 공감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은 차라리 절규와 탄식에 가까울 정도로 영탄조로 작가의 심경을 그대로 표출한다.
오, 어머니 하얀 바람이여 제발 불어다오! 이 일을 막아다오! 당신의 힘은 모두 사라졌는가? 모든 봉우리에 100만 톤의 눈이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하나, 봉우리 하나면 충분하리. 흩날리는 한 번의 눈보라만으로도 아직 그를 구할 수 있으리. 이 산맥의 가장 고귀한 생물이 인간의 가장 천한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쓰러져야만 하는가? 그가 단 한 번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그런 운명이 닥쳐야 하는가? (P.88)
‘포로가 된 코요테’는 인간의 손에서 사육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코요테의 야생 스토리다. 어린 티토가 온정의 보살핌을 받았다면 인간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미지수다. 다만 현실의 티토는 모진 구박과 학대로 그리고 갖가지 괴롭힘의 수법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체득하였을 뿐이다. 티토를 잡기 위한 개, 덫, 독 등의 모든 장치가 무용지물로 변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의 자업자득과 티토의 유별난 지능의 결합이라고 하겠다. 모든 코요테가 티토 같지는 않을 테니. 살진 프레리도그 사냥 장면과 아슬아슬하게 사냥꾼을 피하는 대목은 새삼 티토에 탄복하게 된다. 그러니 그처럼 번영할 수밖에.
인간이 가능한 모든 최악의 짓을 다해 왔음에도, 그들은 인간이 만든 것들로 가득한 땅에서 번성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친 코요테가 바로 티토였다. (P.302)
반면 ‘곰 조니’ 이야기는 우리네 마음을 슬프게 한다. 어미 곰 그럼피와 새끼 곰 조니의 좌충우돌은 우스꽝스럽고 유머러스하게 시작한다. 회색곰에 쫓겨나고 고양이에 혼쭐나는 곰 모자가 딱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조니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 복선을 깔아놓는다. 귀엽고 행복한 새끼 곰이 아니라 다리를 절뚝거리는 초라한 외모와 언제나 성가실 정도로 투덜대는 조니. 독자로서는 슬프지만 조니의 죽음에 차라리 안도하게 된다. 야생이었더라도 조니는 어차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더욱 비참하게 살아야 했을 테니 이렇게 보호자의 품에서 생을 마치는 게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나머지는 소품들인데 그중에서 ‘왜 북미쇠박새는 1년에 한 번씩 미칠까’는 특히 짤막하여 별다른 감흥이 없다. ‘참새 랜디의 모험’은 한마디로 웃프다. 카나리아처럼 노래 부르는 참새라니. 랜디와 비디의 집 꾸미기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모든 신혼부부의 그것과 흡사하여 인간과 동물의 행동 방식의 유사성을 연상시킨다. 그들이 끝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함은 유감이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듯 초연하게 새장 속 삶에 안주하는 랜디가 더욱 딱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야생의 존재가 아니었다.
랜디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결국 랜디는 진정한 야생의 새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풀려난 것 자체가 사고였다. (P.123)
‘열 마리 새끼 쇠오리’는 흐뭇한 미소를 안겨주는 짤막한 소품이다. 우리네 눈에는 작고 하찮은 일화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생사가 걸린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은 셈이다. 그들의 작은 목숨을 노리는 적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달빛 요정 캥거루쥐’는 한 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아름다운 글이다. 캥거루쥐를 달밤의 요정에 비유하여 환상적으로 묘사하여 난생처음 들어보는 종족임에도 호기심과 친근감이 교차한다. 그들이 그토록 바지런하고 대단한 건축가이자 가수라는 사실도. 작가로서는 불가피했다고 머리는 납득하지만 어쨌든 그를 가둬놓고 관찰하는 방식은 시튼치고는 다소간 유감스러운 건 사실이다. 캥거루쥐의 탈출에 일말의 안도와 지지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강아지 칭크’는 개와 인간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다. 진부하고 식상할 법하지만 상황의 긴박성과 극적인 결말은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주인에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칭크. 반복하지만 굶주림과 두려움을 감내하고 며칠 동안 코요테에게 맞선다는 것은 강아지로서는 무모하기조차 한 행위이다. 죽기로 충성하는 칭크를 어떤 주인인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코요테에게 총구를 겨눈 늙은 오브리를 지지한다.
“상관없어요.” 늙은 오브리는 말했다. “그 대신 친구를 얻었으니까요. 항상 나를 믿어 주는 친구를요.” (P.202)
인간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동물이 강아지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무조건 살생과 유희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존엄성을 가진 생명으로 인식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