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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산의 제왕 ㅣ 시튼의 동물 이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평점 :
탈락 산의 잭은 회색곰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왑과 유사성을 지닌다. 둘 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일대의 제왕으로 군림하였고 난폭하다는 평판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 사냥꾼에게 가족을 잃고 외톨이로 성장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양자의 삶은 전혀 다른 길을 따라갔고 그들의 마지막도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은 제법 적잖은 분량으로 단편집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다. 게다가 잭의 일생은 자체로 극적인 대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흥미진진함과 동시에 딱한 생의 여로에 공감과 연민을 이입시키기에 충분하다. 철부지 아기곰 잭의 재롱과 순진함, 그리고 영리함을 보며 우리는 잭이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한갓 애완동물로, 나아가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당하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동류 인간들을 향한 혐오감마저 감출 수 없다. 따라서 잭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을 때 독자의 환호는 당연하였다. 작가마저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로.
잭은 왑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왑이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나무뿌리와 열매 같은 먹이를 선호한 반면, 잭은 양과 소 같은 육식을 선호하였으니 이해의 충돌은 필연적이 되었다. 시에라 산맥에는 자연 상태의 먹이가 부족하였을까? 아니었다, 그건 잭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할 운명이었고 고기에 대한 본능적 선호였을 뿐이다. 눈앞에 영양이 풍부하고 손쉬운 먹잇감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땅을 뒤적거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엇보다도 잭은 살상 자체를 즐겼다. 수많은 소들과 양들을 잡아먹은 악명이 자자한 주변 일대의 육식 회색곰들이 결국 한 마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 때 잭과 인간들 사이에는 불구대천의 관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잭의 파멸을 의미했다. 야생동물이 제아무리 사납고 영리하고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작심하고 뒤쫓는 인간들을 영원히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거대한 곰은 앞발에 코를 묻은 채 우리 안에 엎드려 울었다. 정말이지 길고도 가슴 쓰라린 맹수의 울음이었다. 마치 영혼에 상처를 입어 희망과 삶이 꺼져 가는 사람이 우는 듯했다. (P.127)
사냥꾼과 덫과 총으로도 제압할 수 없었던 탈락 산의 제왕을 패배시킨 것은 달콤한 미끼와 강력한 수면제였다. 인간들은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잭을 이길 수 없었기에 동물적 본능의 유혹을 이용하였다. 우리는 야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애완동물처럼 던져주는 먹이와 속박에 익숙하고 길들여져 가는 제왕의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야생동물에게 자유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어미 여우가, 야생마가 이미 처절하게 입증하였고 늑대 왕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였다.
잭은 삶을 선택하였고 살아남았다. 시튼은 잭의 향후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그리고 어떠한 양태를 갖게 될지 섣불리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잭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멀리 탈락 산과 바다가 있는 방향”(P.131)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