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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5월
평점 :
앞서 스노리 스툴루손의 <에다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북유럽 신화의 원전으로서 정통성을 지닌 반면 13세기에 지어진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오늘날 독자의 시각으로는 비체계적이고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 제법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순전히 북유럽 신화 입문자를 위한 이야기 형식으로 개작한 북유럽 신화라고 하겠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과 지식 없이도 충분히 재미나게 읽을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북유럽 신화의 전반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매우 유용하다. 또한 스노리의 책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의아하게 여겼던 점들이 이 책에서는 또렷이 드러나는데 작가가 다양한 저작물을 활용한 덕분이다.
오딘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들의 아버지이고 또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이든 아니면 인간이든, 오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P.29)
북유럽 신화에서 최고신은 오딘이다. 그는 신들의 수장인 동시에 인간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상이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지혜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한쪽 눈을 포기한 오딘, 라그라뢰크를 대비하기 위해 죽은 전사의 영혼을 거두었던 오딘. 하지만 대체로 그는 최고신이라는 관조자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신화의 상당 부분은 토르와 로키의 모험과 사고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로키를 오딘의 아들로 설정하였지만, 실제 로키는 신족이 아니라 거인족에 속한다. 신족과 거인족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음에도 로키가 어떻게 신들의 세계에 합류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로키가 오딘과 피를 섞은 의형제라는 점도 의아스럽다. 관련 내용은 신화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최고신이여, 당신과 나는 아주 오래전에 피를 섞은 사이 아닙니까. 그렇죠?”
“위대한 오딘이여, 그때 당신이 맹세하기를, 연회석상에서 서로 맹세를 나눈 의형제 로키가 함께 있어야만 술을 마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P.268)
로키의 온갖 술수와 배신, 그리고 사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로키를 처벌하지 못한다. 바로 오딘과 로키의 맹세 때문이다. 로키가 발드르의 죽음을 초래하고 부활을 저지한 데다 신들을 모욕하였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징은 로키의 자식을 죽이고 그를 묶어두는 데 불과하였다. 아마도 신들에게 있어 로키는 필요악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겠다.
그에게 가장 감사함을 느낄 때조차 마음 한구석에는 분노의 기운이 남아 있고, 그를 가장 미워할 때에도 어느 정도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P.63)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이 단일 종족이 아닌 점도 기묘하다. 오딘과 토르 등이 속한 에시르 신족과 프레이와 프레이야가 속한 바니르 신족이 전쟁의 결과 평화 조약을 맺고 연합했다는 사실, 그리고 로키의 존재로 미루어 복잡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난쟁이에게서 얻은 보물을 바치는 상대가 오딘, 프레이, 그리고 토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신계에서 최상위의 지위를 가진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불멸성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북유럽 신화의 신들도 자연사하지 않는 점에서 불멸이지만 그것이 여신 이둔의 사과에 의존한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와 달리 여기 신들은 다른 신 또는 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제약적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크바시르는 난쟁이들에게 목숨을 앗길 정도로 약한 존재이다. 신들이 로키의 세 자식, 특히 늑대 펜리르를 그토록 잡아두려고 애썼던 것도 늑대에게 목숨을 빼앗길 우려에서 비롯됨이었다.
신들의 지역인 아스가르드 역시 헤임달이 감시를 하는 비프로스트를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고 하면서도 거인 오거가 감쪽같이 오딘의 망치를 훔쳐 가는 게 가능할 정도로 보안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낸다. 산의 거인 덕택으로 튼튼한 성벽을 쌓았지만 토르의 묠니르에 거의 전적으로 치안을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그나뢰크가 시작되자 무지개다리와 성벽은 무용지물에 불과하였다.
수르트와 무스펠의 아들들은 화염 속에 서 있고, 헬과 로키의 전사들은 땅속에서 나타난다. 흐림의 부대인 서리 거인들도 그곳에 와서 발 디디고 서 있는 진흙땅을 얼려버린다. 펜리르도 그들과 함께하고 미드가르드의 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적들이 모두 그날 그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P.288-289)
신들의 최후는 발드르의 죽음에서 촉발된다. 신들과 로키의 해묵은 갈등이 마침내 이를 계기로 폭발하고 신들의 적대세력이 합심하여 아스가르드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들의 구성을 보면 한마디로 다국적 동맹군이다. 오딘도, 토르도 모두 쓰러지고 헤임달마저 로키와 대결 후 함께 목숨을 잃는다. 자기편이 결국 이겼다는 로키에게 헤임달은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이건 끝이 아냐. 끝은 없어. 그저 옛 시대의 종말일 뿐이지.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죽음 뒤에는 항상 부활이 따라와. 넌 패한 거야.” (P.294)
그렇다. 라그나뢰크는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의 멸망이지 세계의 최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그드라실은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서 있으며 그 안에 인간 ‘생명’을 품고 있기에. 훗날 그들의 자손은 신들의 세상 이후에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