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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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최초의 작품집이다.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채로운 성향의 작품을 통해 오사무 초기의 문학세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만년>이라는 표제가 독특하다. 대체로 작가 자신의 삶에서 제재를 끌어낸 작품이 내용과 분량 면에서 주를 이루는데, <추억>, <어릿광대의 꽃>이 그러하다.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추억>, P.46)

 

<추억>을 통해 독자는 작가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의 촉각도 감지할 수 있다. 두 명의 여인, 즉 숙모와 미요에 관련된 추억이 이야기에 아스라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미요와의 포도 따기 장면이 풍기는 은근한 정서는 고대 일본에서부터 내려오는 고유의 독자적 미학과 상통한다.

 

나는 만족했다. 그만한 추억이라도 미요에게 심어 준 것은 나로선 힘껏 애쓴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요는 이제 내 것이 되었어, 하고 안심했다. (P.70)

 

<어릿광대의 꽃>의 주인공은 유명한 <인간실격>과 동일하게 오바 요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두 작품의 친연성을 작가는 의도하였으리라. 동반 자살에 실패한 후의 오바의 일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의외로 문병 온 친구들로 인해 시끌벅적하고 간호사도 한데 어울려 살짝 유쾌한 정서마저 내비칠 정도다.

 

나는 삼류 작가가 아닐까? 아무래도 기분을 너무 낸 것 같다. 파노라마식 해 가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꾀하고는, 마침내 이 모양으로 우쭐거린다. (P.130-131)

 

작가의 동 사건에 대한 소설 속 파노라마적 장면 전개라는 외양을 띠고 있는데,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잦은 빈도는 불필요하기보다는 오히려 씨줄과 날줄처럼 독자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가의 개입은 독자가 작품에 함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통제하여 독자가 보다 비판적으로 작품을 대하도록 유도한다. 작가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의 작품과 형식적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작가의 개입은 <완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늘 절망 곁에서 상처 입기 쉬운 어릿광대의 꽃을 바람도 못 쐰 채 만들고 있는 이 서글픔을 네가 이해해 준다면! (<어릿광대의 꽃>, P.149)

 

벌어진 사건과 작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즐겁고 유쾌한 척하는 어조는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딱한 동정심을 유발한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작가 자신을 희화화하는 듯한 유형이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에서 발견되는 특색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의 어이없을 정도의 우스꽝스러움이다. 당사자는 진지하고 고매한 척하지만 외인의 눈에는 재주도 없는 마당에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무위도식하는 한량에 불과하다.

 

좋아. 그렇다면 네게 묻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어깨를 흔들거나 고개를 떨구거나 나뭇잎을 잡아 뜯으면서 어슬렁 어슬렁 헤매고 다니는 저 남자, 그리고 여기 있는 나.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P.261)

 

<역행>은 두 가지 유형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노인의 그는 <인간실격>의 오바 요조를 연상시킨다. ‘결투의 그는 좌충우돌하는 자신을 희화화하지만, 해학미가 두드러진다. 해학적 요소는 <원숭이 섬>으로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안온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감내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나타난다.

 

오사무는 옛이야기에서 소재와 문체를 빌려와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방법도 택하고 있다. <어복기>가 자아내는 고적함과 스와의 쓸쓸함이 독자에게도 풍겨온다. <로마네스크>는 선술, 싸움, 거짓말의 달인이라는 설정과 그네들의 역설적 삶의 방향이 묘한 웃음과 함께 씁쓸함을 안겨준다. 이 두 작품은 앞서 다른 책에서 읽은 바 있다.

 

내용에 앞서 독특한 문체가 눈길을 사로잡는 유형으로는 단연 <참새><장님 이야기>. 전자는 쓰가루 방언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번역본으로는 독특한 음색을 알기 어렵다. 후자는 두서없이 읊조리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가속도로 진행되는 문장을 따라가자면 숨이 가쁠 정도다. 문체로 말하자면 <>도 빠질 수 없다. 아포리즘과도 같이 개연성 없이 나열되는 문장들은 시적 감수성과 함께 단속적이나마 화자의 사고와 형편을 엿볼 수 있다.

 

죽을 생각이었다. (<>, P.7)

어떻게든, 되겠지.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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