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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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진실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때로는 외면하고픈 마음도 들 때가 있다. 그것이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희곡을 읽는 내 심정이 꼭 이러했다. 17세기 광기와 공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사회의 정당한 권위에 올라타고 인간성과 이성을 무참히 압살하던 역사적 기록. 훗날 우리는 이를 마녀재판이라 칭하며 이를 주도했던 당대 사회와 인물, 특히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일 수 없다.

 

역사의 진보를 굳건히 믿는 사람들에게 17세기의 마녀재판과 20세기 중반의 매카시즘은 비이성적 광기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그것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외투를 차용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개인적 목적을 위해 조장한 공포의 위협과 광기로의 확산은 그 주장이 갖는 터무니없는 불합리성을 건드리지 못한 채 해일처럼 사회를 휩쓸어 무수한 피해자를 양산하였다.

 

작가는 질문한다. , 무엇 때문에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종교계, 재계의 인물들은 어떻게 정치적, 개인적 이익 달성을 위해 이러한 광기를 심화하고 유포하는데 이바지하였는가? 여기서 작가는 특유의 희곡적 기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정공법으로 서사와 대사의 힘으로 극의 강력한 전개를 밀어붙인다. 압박감에 숨이 막힐 정도이지만 독자는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한다.

 

퍼트넘, 애비게일, 패리스 등이 사적 이익을 위해 악마와 마녀의 출몰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반면 헤일 목사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이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자세는 한치의 허물도 탓할 수 없다. 레베카와 프록터에 대한 사례를 통해 그의 확고한 신념은 금이 가고 마침내 그는 마녀재판이 전적으로 오류임을 깨닫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의 유일한 잘못은 초기에 악마의 존재에 대한 지나친 경도로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그의 과도한 순수성 내지 순진성을 비판할 수밖에. 그것이 악용되면 광기로 전환되기 쉬우므로.

 

(헤일) 그들은 자백을 했습니다.

(프록터) 부인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판인데 왜 자백하지 않겠습니까?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고 무엇이나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P.106)

 

(헤일) 저는 법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무서운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악마가 세일럼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발하는 손길이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든지 감히 겁내지 말고 쫓아가야만 합니다! (P.110)

 

극의 주인공은 프록터다. 작가의 긍정적 소개 글을 통해서도 그가 견실한 농부인 동시에 비판적 신앙인임을 알 수 있다. 드물게 보는 지성인인 그조차도 애비게일과의 관계에서 약점을 지녔으니 완전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애비게일로부터 파문은 비롯된다.

 

악마의 수하로 지목당한 사람들의 선택 대안은 두 가지다. 악마와 거래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목숨은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당사자는 다른 악마의 수하를 지목해야 한다. 거래를 부정하고 자신의 신앙적 올곧음을 주장한다면 그는 교수형을 모면할 수 없다. 양심과 생명 사이에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독자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프록터의 고뇌와 갈등에 공감하며, 그와 아내의 엇갈린 증언에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록터가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며 형장의 북소리와 함께 사라짐에 대해서도.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정치적인 정책은 도덕적 권리와 동급이고, 그걸 반대하는 것은 악마적인 악의와 동급이 된다. 일단 이 같은 등식이 효과적으로 맺어지면, 사회는 책략과 대항의 집적으로 변하며, 정부의 주된 역할은 중재자에서 하느님의 응징으로 바뀐다. (P.56-57)

 

악마와 마녀는 종교의 영역이다. 정치와 법정이 종교에 개입한다면 남아날 존재가 없다. 종교와 얽혀진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를 예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시하며 우매한 옛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잘못된 마녀재판을 중단할 권한과 때를 지닌 유일한 인물이 부지사 댄포스다. 헤일 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처럼 그도 오해와 착오를 범하였지만 진실의 그림자를 접하였으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하므로. 정치적 인간은 냉혹하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킬 용의를 갖고 있다. 헤일 목사의 절절한 호소조차도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세일럼의 비극이 절정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다.

 

(댄포스) 지금 연기한다는 것은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게 되오. 형 집행의 연기나 사면은 지금까지 죽은 자들의 죄에 의혹을 일으킬 것이오......나는 감히 법에 대항해서 반기를 드는 자들은 만 명이라도 교수형에 처하겠으며, 짠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도 법의 결정을 녹일 수는 없다는 것을. (P.190)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대변되는 광기는 완전히 소멸했을까? 우리는 쉽사리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면 중동과 이슬람 지역의 종교분쟁이 여전하다. 이데올로기는 어떠한가? 공산주의 몰락으로 과거와 같은 대대적인 매카시즘 선풍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바이러스처럼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있어 언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우리네 심정은 결코 편치 못하다. 세일럼은 과거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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