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간산을 내려가다가 현대희곡선 3
아더 밀러 / 현대미학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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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먼의 이중 결혼생활을 향한 의견은 성별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대다수의 건전한 이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이라면 라이먼의 비도덕성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낼 것이다. 결혼의 신성한 서약을 송두리째 뒤집은 그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이먼에게 깜빡 속은 두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 무한한 동정심을 표한다. 극소수의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은 꿈꾸지만 차마 실행하지 못한 욕망을 감히 행동에 옮긴 라이먼의 용기에 갈채를 보내며 딱한 처지에 놓인 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한다.

 

(라이먼) 솔직히 자네 같은 일부일처주의자들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믿지를 않았어. 데오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걸 알 수 있다구. 데오도 행복할 리가 없어. (P.35)

 

일부일처제로 대변되는 결혼제도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의 관점에서 라이먼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외견상 화목하고 평화로우며 부러움을 살만한 모범적인 부부와 가족에게서 라이먼은 무슨 불만과 부족을 지녔단 말인가? 일순간의 흔들림이 있었더라도 잘못을 깨닫고 리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데오에게 돌아오는 게 순리가 아닌가 등등. 독자는 라이먼과 데오의 대사를 통해 완벽하게 보이는 부부관계에서조차 미묘한 흠결이 상존함을 발견한다.

 

사랑하면서도 관계에 의한 흠결을 가슴에 담고 살아나가는 게 대다수의 부부다. 중혼 기간 동안 라이먼과 두 부인과의 관계는 돈독하고 오히려 행복했다는 사실을 그녀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데오의 남편 라이먼과 리가 아는 라이먼은 같지만 다른 인물이다. 경비행기를 몰고 스포츠카를 질주하는 라이먼의 모습을 데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자네 바라는 게 뭐야?

(라이먼) 내 평생의 소망은 두 여자였어. (P.87)

 

비록 한구석으로 자유와 일탈을 희망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의 꿈에 불과하다. 라이먼은 다르다, 자신의 바람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점에서. 라이먼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성이 아닌 보편적 남성의 숨겨진 욕망을 대변하는 전형에 가깝다.

 

병실에 누워 꿈과 현실을 오가며 라이먼은 자신과 데오 간의 숨겨진 결혼생활의 이면을 독자에게 드러낸다. 모두가 궁금해할 데오와의 이혼을 감행하지 않게 된 사유도. 이 과정에서 라이먼은 불리할 때면 깁스한 몸속으로 숨어들며 어떻게든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두 부인과의 관계도 유지하길 원한다.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듯 작가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기 위한 기법으로 플래시 백 기교를 사용하여 실제 장소는 병실 한 군데이지만 극 중 스펙트럼은 뉴욕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광활하게 십 년여에 걸쳐 펼쳐진다.

 

라이먼의 온갖 호소와 노력에도 두 부인은 그의 곁을 떠난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마당에 그녀들이 피해자로서 대중적 동정심 유지 및 자신의 도덕적 자존감을 지키려면 다른 방안이 없으리라. 데오의 내심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베시를 비롯한 현실이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리는 자신이 법률상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서 그를 떠날 명분이 충분하다. 데오가 비판했듯이, 그녀와 라이먼의 관계는 애당초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게 시작하였다. 이렇게 작품은 부도덕한 라이먼의 심신이 파탄 나는 것으로 끝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라이먼) 그러나 이 말을 꼭 해야겠어 비참하고 슬픈 내 영혼은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고 있어. 왜 내가 비난받아 마땅한지를 말이야. (P.138)

 

라이먼과 작가는 이렇게 끝낼 마음이 추호도 없다, 라이먼의 항변처럼. 법률과 도덕의 허울을 벗어던지면 라이먼은 거짓 없이 솔직하다. 일부일처제의 부부관계에서 얼마나 부도덕한 행위와 사건들이 자행되는지는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네 과거사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일부일처제는 신성불가침한 하늘의 윤리원칙이 아니다.

 

중혼 생활이 드러나고 부인들이 떠나가 외톨이가 된 처지이지만 라이먼의 꿈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병실에는 아직 새로운 여인이 남아있다. 간호사! 본능의 질주를 향한 수컷의 억제 불가능한 맹렬한 기세. 마지막 장면서 라이먼의 얼굴에는 놀람과 욕망이 드러나며 그의 입은 기적을 외친다. 꿈이 현실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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