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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엄의 비극 ㅣ 지만지 희곡선집
엘리자베스 탠필드 케리 지음, 최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평점 :
근래 읽고 있는 영국 르네상스 시기의 희곡 중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 가장 고전적이다, 코러스의 등장과 삼일치 기법 등 그리스 고전극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더구나 다른 작품과는 달리 당대가 아닌 고대 유대 왕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 또한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헤롯왕과 메리엄 왕비의 비극적 이야기는 꽤 유명한 듯 한데 우리로서는 작품해설의 역사적 일화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전체적 맥락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메리엄의 비극은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 메리엄은 헤롯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헤롯이 자신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의 조부와 남동생을 죽였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과 헤롯의 종족적 신분차이에 대한 우월감이 양자의 진정한 결합을 가로막는다. 제1막 제3장에서 메리엄이 살로메에게 퍼붓는 비난은 출신 우월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순수한 유대인이며, 헤롯과 살로메는 잡종이라는 인식. 죽음에 이르러서야 메리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겸허함’이 부족하였다는 것, 즉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함에 이르렀다는 점 말이다.
개인적으로 헤롯에게 일말의 동정과 공감을 느낀다.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모를 지닌 왕비에 대한 사랑과 집착, 한편으로는 순결함에 대한 불안감. 미천한 출신과 왕권 강화를 위해 감행할 수밖에 없던 행동들. 진부하지만 사랑과 야망 사이에 줄타기를 해야 할 운명에 처한 왕의 고뇌. 한 사내가 아닌 왕으로서 그는 야망을 선택하고 그것은 메리엄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메리엄의 처형 이후 헤롯의 슬픔과 방황은 제5막 제1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장대한 독백에서 헤롯은 갈등을 유발한 살로메는 물론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명에 의해 사랑하는 메리엄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 한 광인처럼 한없는 자책과 저주를 되뇌는 헤롯에게서 일말의 광기마저 엿보이는 것은 그만큼 처절함이 극에 달한 탓이리라.
(헤롯) 물러나라, 흉측한 괴물아, 순결한 대지를 형제의 피로 더럽힌 그자보다 더 사악한 자여. 어느 지하 감옥이나 굴 안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거라, 그곳에서 너의 눈물로 홍수를 만들고, 때가 되면 그 홍수가 너를 물에 잠겨 죽게 하라. [제5막 제1장]
작품의 핵심적 인물은 물론 메리엄과 헤롯이지만, 주연급 조연으로서 살로메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엄이 햄릿형이라면 살로메는 돈키호테형이다. 메리엄은 헤롯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만 소극적 저항에 그친다. 반면 살로메는 과감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쏠림과 선택에 주저함이 없다. 장애물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종족과 종교의 차이도 거침없다.
(살로메) 난 관습을 깨뜨리는 자가 되겠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자유의 문으로 가는 길을 보여 줄 것이며, 제물을 바쳐 내 죄를 정결케 할 것이다. [제1막 제4장]
위와 같이 전례 없이 콘스타바루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살로메야말로 극중에서 전형적인 악녀로 취급받겠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주체적 여성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바람직한 의미여부에 상관없이.
각 막의 마지막 대목은 코러스가 장식한다. 코러스는 극중 인물이 예견하지 못한 앞일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어 극의 전개를 예감케 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통해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히 한다. 그것은 작품 내적 당위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메시지로서 안전을 도모하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2막 제4장에서 소문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 것을 조언하며, 제4막 제8장에서 복수에 반대하며 용서의 미덕을 강조한다. 마지막 제5장 제1장의 코러스는 주요 인물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담아 극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케리는 자기 자신을 메리엄과 살로메에 투영한다.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자신의 내면적 가치가 상충할 때의 괴로움을 메리엄에게, 자신이 그러했듯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독자적 선택의 과감함은 살로메에게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작품에 깊이 투영하며 고대에서 제재를 따오는데 자신의 고전 지식에 대한 역량의 표출일 수도 있지만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차원적 목적도 다분히 반영하고 있음 또한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고전극의 외형을 띠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극히 근대적이다.